이탈리아 중부 오르비에토의 오후 6시 풍경은 독특하다. 해가 떨어져 겨울바람이 더욱 찬데 거리에는 한낮보다 인파가 점점 많아진다. 이 마을의 전통인 저녁 산책, ‘파세쟈타’가 시작됐다. 매일 오후 6~8시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누빈다. 밍크 코트를 걸친 금발의 아주머니들, 유모차 미는 부부와 어린 자녀들, 젊은 연인과 애완견 무리도 나섰다. ‘파세쟈타’는 보통 시청 앞 광장 ‘피아차 델라 레푸블리카’에서 시작해 이 마을 최대 번화가 ‘코르소 카부르’를 따라 13세기 대성당 쪽으로 향하는 코스다.

‘파세쟈타’ 행렬을 따라 걸었다. 마을의 최대 번화가라는데 번쩍이는 간판이 없다. 약국임을 알리는 녹십자가 거의 유일한 네온사인이다. 거리는 차량 통행 금지라 요란한 소음이라고는 솜사탕 기계의 소박한 덜덜거림뿐이다. 보통 저녁 먹고 TV 앞에 앉아 있을 시간, 추운 거리로 나온 이유를 오르비에토 시청 직원 마시모 보리씨는 “전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산책을 하면서 신세대와 구세대가 어울리고 주민들이 서로 안부를 묻지요. 여름에는 거꾸로 성당에서 시청 앞 광장 쪽으로 걷습니다. 성당 쪽이 지대가 높아 더 시원하거든요.”

언덕 위에 올라앉은 오르비에토 전경. 수백년 된 고색창연함과 여유로운 삶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오르비에토는 900년 된 성벽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도시다. 골목길은 구불구불한 미로처럼 꼬였다 풀린다. 우뚝 솟은 언덕에 올라앉은 마을이라 운해(雲海)라도 몰려오면 신비로운 공중도시가 따로 없다. 마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도 ‘보석’으로 손꼽히는 곳이라 로마에서 기차로 1시간 거리인 이곳에 몰려오는 관광객은 연간 200만명에 달한다. 그런데 오르비에토는 국제적 명성의 절정에서 거꾸로 가는 길을 택했다.

피아차 델 포폴로에 선 마을장 풍경.

오르비에토는 ‘슬로시티(Slow City)’다. 관광객 유치·첨단화·일상의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답게 사는 마을이 되겠다’며 1999년, 이탈리아의 다른 몇몇 마을과 함께 ‘슬로시티’를 선언했다. 마을 전체가 느리게 가는 ‘슬로시티’란 아이디어를 낸 인물은 15년째 오르비에토 시장을 맡고 있는 스테파노 치미키씨다. 올리브 농장과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수확철이면 아내를 돕기 위해 1주일~한 달 정도 농장으로 달려간다”고 말한다.

“우선 자동차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오르비에토의 인구는 2만1000여명. 마을 동쪽 끝~서쪽 끝까지 2㎞가 안 된다. 건물과 도로가 수백년 전, 노새가 마차 끌던 시절 규모 그대로이기 때문에 무섭게 늘어나는 자동차는 행인들에게 절대 위협이었고 마을의 생명인 광장은 주차장으로 속속 용도가 변경됐다. 때문에 ‘슬로시티’ 오르비에토가 내린 결단은 번화가의 차량통행 금지. 대신 마을 밖에 주차장을 짓고 방문객이 차를 두고 들어오게 했다.

마을 서쪽 끝. 영화 세트장 같은 중세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마술처럼 눈 앞에 현대식 엘리베이터가 나타난다. 도시의 명물인 지하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방문객은 지하에 차를 대고 로마인보다 먼저 이 지역에 살았다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수로 유적을 감상하며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시로 올라오게 된다. 마을 동쪽 끝에서는 언덕 아래 기차역을 향해 미니 전차가 출발한다. 마을을 누비는 것은 오렌지색 전기 버스다.

오르비에토의 최대 광장인 ‘피아차 델 포폴로’에 장이 섰다. 주차장이 될 운명이었던 광장에 옷가지·꽃·육류·주방용품을 파는 상인들이 몰렸다. “이탈리아가 피아차를 발명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자랑한 치미키 시장은 “수백년 전 조성된 피아차의 용도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 용도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 공간”이라는 설명이다.

지하주차장과 지상연결 지하 주차장과 지상 도시를 연결하는 ‘무빙 워크’. 오르비에토=정재연기자

현대 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느림 쪽으로 선회하려니 할 일이 태산이다. 특히 이탈리아 슬로시티 운동의 본부랄 수 있는 오르비에토 시청은 부산했다. 마시모 보리씨는 “슬로시티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지런히 기술개발에 나서 쾌적한 마을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르비에토 외곽 저수지에서는 수소 에너지 개발이 한창이고 가로등은 별빛을 가리지 않기 위해 아래로 향한 디자인일 뿐 아니라 부드럽고 은은한 ‘예술 조명’이다. 고층 건물이 없는 오르비에토에서 사람들은 마을 한가운데 시계탑을 보고 위치를, 종소리로 시간을 확인한다. 마을 한쪽에는 주민들이 흙을 만질 수 있도록 ‘오르티 소샬리’(공공 텃밭)가 조성돼 있고 일년에 두 차례, 교사·영양전문가·학부모 대표들이 만나 학교 급식 메뉴를 짠다.

시청이 앞장서 수립하는 마을의 ‘슬로 전략’은 주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통적으로 느림 지향적이라 호응과 효과가 높다. 오후 1시. 상인들이 “4시에 다시 오라”며 상점 셔터를 내려버린다. 25년째 한 장소에서 스웨터와 와이셔츠를 팔고 있는 상인 산드로 굴리노씨는 “젊어서는 사랑을 하고 늙어서는 가족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이 이곳 주민들의 꿈”이라고 말했다. “슬로시티의 좋은 점요? 일단 동네가 조용해져서 맘에 듭니다.” 서구식 보통 대도시에 사는 이들에게는 황당무계하고 비효율적으로 비칠지 모르나 오르비에토는 성벽 안에 고인 침묵과 느림을 지키기 위해 빠름에서 유턴한 곳이다.

(오르비에토(이탈리아)=정재연기자 whauden@chosun.com)



▲ 슬로시티가 되려면…




▲ 인구는 5만 이하로 조절

▲ 대체 에너지 등 환경친화 기술 개발

▲ 마을 광장 네온사인 없애기

▲ 전통 수공업·조리법 장려

▲ 문화 유산 지키기

▲ 차량 통제 제한

▲ 자전거 길 만들기

▲ 나무심기

▲ 경적 등 소음 줄이기

▲ 주민들의 의견 수렴

▲ 글로벌 브랜드의 대형 체인점 거부

▲ 패스트푸드·유전자 변형 음식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