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렬씨가 자신의 초등학교 학적부를 보여주고 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역사는 거짓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충북 청주시 금천동에 거주하는 유흥렬(柳興烈·73)씨는 신문·방송에 보도되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행위를 접할 때마다 치를 떠는 분노감을 느낀다. 일부 정치인들이 보수우익층 지지표를 얻기 위해 태평양 전쟁의 발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고이즈미 총리까지 나서 전범들의 위패가 놓인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씨가 가장 흥분하는 대목은 ‘조선인들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일부 일본 사람들의 망언이다.

“강제로 이름까지 빼앗아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요.” 유씨는 일본측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뒤엎기 위해 8년전부터 창씨개명의 강제적 시행을 입증하는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고향이며 문화 유씨 문평군파 집성촌인 충북 보은군 산외면 산대리 신개울 마을은 일제말 전국에서 보기 드물게 마을 주민 전체가 창씨개명을 집단 거부한 곳이다. 20여 가구의 문화유씨 문중은 어떠한 불이익이 있어도 창씨개명에는 응하지 말자고 결의, 서슬퍼런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켰다. 유씨 본인은 초등학교 졸업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이 좌절됐고, 일본에 유학갔던 사촌형은 한국으로 쫓겨나와 의문속에 죽음을 맞기도 했다. “창씨 개명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됐어요. 학교에 못 다니는 것은 물론 변변한 직업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유씨는 해방 덕분에 청주고교에 입학해 대학까지 마치고 교직과 금융기관에 몸담다 정년 퇴직했다.

유씨는 당시의 창씨개명 불응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산외면사무소와 산외초등학교를 수차례 방문, 호적부·학적부·졸업자 명부 등 관련자료를 철저히 수집했다. 창씨개명에 불응한 신개울 마을을 사적지로 지정받기 위해 주민서명도 받아놓았다. 유씨는 자신이 모아놓은 각종 자료를 당국이 영구 보관하고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해주기를 기대한다.

“특정 집안의 자랑거리를 보여주자는 게 아니예요. 자라나는 세대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죽는 날까지 일본의 역사왜곡을 바로잡는데 앞장서겠다는 게 유씨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