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 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지난 20년간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이란 장르가 쏘아올린 가장 빛나는 성단(星團)이었다. 뒤늦게 개봉되는 그의 1992년 작 ‘붉은 돼지’(19일 개봉)는 어른들을 위한 아름다운 동화이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중년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숱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대상을 휩쓴 ‘붉은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애니메이션들처럼 그해 일본에서 실사영화·만화영화를 통틀어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들인 영화이기도 했다.
꿈과 현실이 멋지게 혼재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포르코라는 이름의 붉은 돼지. 제1차 세계대전 때 용맹을 떨친 이탈리아 공군 장교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됐다. 그는 현상금이 붙은 하늘의 도적떼들을 사냥하며 살아가지만, 도적떼들이 그를 해치우기 위해 영입한 미국인 파일럿 커티스의 공격을 받아 비행기가 격추되고 만다. 소녀 비행기 설계사 피오의 도움으로 새 비행기를 갖게 된 포르코는 곧 커티스와의 일대일 대결에 나선다.
‘붉은 돼지’의 표면은 더없이 평화롭고 따스하지만, 사실 그 속엔 ‘모노노케 공주’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 미야자키 특유의 염세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문명과 인류 자체에 대한 혐오로 자청해서 돼지가 되어버린 포르코는 이를테면 스스로 성장을 거부한 영화 ‘양철북’의 소년 오스카와 같다. 그는 갖고 있는 돈으로 애국 공채를 사라는 은행원의 권유에 “애국 따윈 인간끼리 많이 하쇼”라고 차갑게 내쏘고, 이탈리아 공군으로 돌아오라는 옛 동료의 충고에 “파시스트보단 돼지가 낫지”라고 냉소적으로 대꾸한다. 몸은 흉한 돼지이지만 종종 할리우드 고전 스타 험프리 보가트를 떠올리게 하는 이 ‘쿨한’ 캐릭터는 ‘붉은 돼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빨간 비행기로 푸른 바다 위 창공을 날아다니는 장면들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을 유달리 좋아하는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서 아예 작심하고 활공의 이미지에 집중했다. 여기서 비행기는 새파란 하늘과 지중해 푸른 물살 그리고 촘촘히 박혀 있는 조각 섬들을 담아내기 위해 분주히 패닝(카메라를 좌우로 회전시키는 촬영술)하는 카메라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시대적 배경을 삼은 것도 사실 가장 멋진 비행 장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글라이더를 띄우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새 비행기가 처음 이륙에 성공하자 피오는 “세상은 정말 아름다워”라고 감탄을 내뱉는다. 어쩌면 그 탄성이 이 영화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매주 수없이 쏟아지는 영화 속에서 ‘붉은 돼지’의 매력적인 염세주의도 매혹적인 캐릭터도 곧 잊힐 수 있다. 그러나 텅 비어서 더욱 아름다운 하늘에 꿈결 무늬를 수놓은 빨간 비행기 한 대는 아마 오래도록 당신의 가슴 언저리를 맴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