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인 깊이가 있다. 김기림의 산문은 예지적이다. 정지용의 산문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의 산문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의 산문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을 숨겨 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
문학평론가인 방민호(方珉昊·38) 국민대 교수는 한국 근대가 낳은 가장 훌륭한 문장가들로 이광수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채만식 등 5명을 꼽고, 각자 문장의 미덕을 이렇게 평했다. 명문(名文)이란 무엇인가. 방 교수에 따르면 ‘영원한 현재성’이 있는 글이다. 비록 과거에 쓰였지만 언제 읽어도 가치있는 문장으로 다가오고, 오늘을 사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들이다. 그가 최근 출간한 ‘모던 수필’(향연刊)은 1920년대부터 광복 직후까지 우리 문학사에서 빼어난 산문정신을 보여준 51명의 명문 91편을 모은 책이다.
'꽃도 잎도 이울고 지고 산국화도 마지막 스러지니 솔 소리가 억세어 간다. 꾀꼬리가 우는 철이 다시 오고 보면 장성 벗을 다시 부르겠거니와 아주 이울어진 이 계절을 무엇으로 기울 것인가. 동저고리 바람에 마고자를 포개어 입고 은단추를 달리라.'(정지용 1941 '꾀꼬리와 국화')
'모던 수필'의 가장 큰 특징은 문인들의 이념이나 성향, 성(性) 등 모든 외적 조건에서 벗어나 '글 자체의 가치'를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 강경애 계용묵 김광섭 김기림 김남천 김달진 김동석 김동인 김동환 김사량 김석송 김용준 김유정 김일엽 김진섭 나도향 나혜석 노자영 노천명 박계주 박영희 박종화 박태원 박팔양 백석 백신애 안석영 안회남 엄흥섭 오장환 이광수 이기영 이병기 이상 이석훈 이선희 이원조 이은상 이태준 이효석 임화 정인택 정지용 지하련 채만식 최도견 최서해 한설야 한용운 현덕 현진건 등 51명의 이름이 그렇게 추려졌다. 수록된 글의 출전은 일제시대 조선일보·동아일보와 잡지 조광·박문·조선문단·문장·여성·삼천리 등이 대부분이다.
이 선집의 제1부 ‘첫눈처럼 싱싱한 생의 감각’에는 계절·꽃·음식·생물을 대상으로 삼은 산문이 실렸다. 최서해는 ‘새봄을 맞는 때마다 달라지는 형모(形貌)는 차마 볼 수 없이 괴롭’(‘봄!봄!봄!’ 1929)다고 했고, 김기림은 소나무를 노래하며 ‘구시월 달 휑한 날씨에 뭇 산천초목에서 푸른빛이란 빛은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그 서릿바람도 솔 잎새 가시만은 조심조심 피해서 달아난다’(‘소나무頌’ 1940)고 했다. ‘하얀 눈은 일부러 푸른 솔가지를 가려서 앉으러 온다. 봉황이가 운다면 아마도 저런 가지에 와 울겠지. 솔 잎새 가시가 살가워 나는 손등을 찔려 본다.’
이광수의 ‘오동’(1936)과 ‘돌베개’, 노천명의 ‘목련’(1948), 채만식의 ‘명태’(1943), 김동인의 ‘별’(1935)에도 글향기가 가득하다. 나도향의 ‘그믐달’(1935)과 이태준의 ‘책’(1941)은 탐미적 수사가 극점에 이른다. 나도향은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면서 그 근거로서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을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어여쁜 계집/…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비절하고 애절한 맛/…’이라는 관찰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제2부 ‘생활은 신념을 낳고 신념은 태도를 길러’에는 당시의 암담한 현실에서 문학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절실함이 배어 있는 글이 모였고, 제3부 ‘모던 조선, 낯설지 않은 오늘의 풍경’에는 서구화 과정을 거치는 조선에서 전통과 개화 사이의 조화와 불화를 담은 글들이 담겼다. 제4부 ‘목놓아 부르노라 설움에 겨워 부르노라’는 젊은 나이에 타계한 문인들에 대한 당대의 조사(弔辭)들로 구성돼 있다.
'그대, 한번 화거(化去)하니 소조(蕭條)한 문단은 더욱더 무색하구나. 빛없는 소단(騷壇)에 문성(文星)이 떨어지니 때는 정히 암야(暗夜)와 같다.' (박종화 '오호, 도향' 1926)
주옥같은 산문들을 통해 한국의 근대 정신이 무엇이었던가 탐색할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