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엔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이었으나 지금은 증권사 영업사원인
강승완(김승우)은 갈비집 여사장과 춤을 추면서까지 투자를 구걸하며
비루하게 살고 있다. 조직폭력배의 돈까지 날려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터널 속에서 자신을 빼닮은 동명이인 프로 골프 스타와 마주치고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두 승완의 삶이 뒤바뀐다. 골프 스타로
변한 승완은 미녀 지영(하지원)과 불안한 동거를 시작한다.
'역전에 산다'(13일 개봉)는 유쾌한 코미디다. 얼굴이 닮은 두 사람의
신분이 바뀌어 일이 꼬이는 줄거리는 고대 로마의 희극 '쌍둥이
메내크미' 이후 숱하게 써먹은 이야기. 그러나 이 낡은 수법도 시대상과
맞물리면 신선한 웃음을 캐낼 수 있다. '로또 열풍'에 사로잡힌 2003년
한국이라면 인생 역전극은 이미 하나의 유행이다.
'역전에 산다'는 "이 영화는 가짜야"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광화문
사거리가 공원으로, 기자가 아내로, 폭력배가 의사로, 친구의 애인이
불륜 파트너로, 직장 상사가 택시 운전사로, 야구 해설가가 골프
해설가로 변한 세상은 순 엉터리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뻔한 거짓말을
눈감아 주면 영화는 더 우습고 경쾌해진다. 로또 복권을 살 때 누구나
'거짓말 같은 당첨'을 꿈꾸지 않는가.
승완이 꾸는 꿈이긴 해도 나머지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감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막힌 설정과 군살 없이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약점들을 감췄다. 승완의 휴대전화 벨소리만 해도 그렇다. KBS
'인생극장'으로 귀에 익은 이 음악은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와 달리
장엄하지만, 허구를 진실처럼 포장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솔직하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호연을 보여준 김승우는 이 코미디에서도
능청스러운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오른손잡이인데 과일은 왼손으로 깎는
여자 같은 설정이나 "까무라치겠네" "쇼 하지 마" 등의 대사는
뒤죽박죽 엉망이 된 현실을 잘 비춰춘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현실을
비트는 풍자가 별로 없다. 그래서 감동이 약하고 허탈해진다. 로또
복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