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이 오면 다른 아버지들처럼 아들과
극장에 가곤 했다. '구니스' '나홀로 집에' '애들이 6㎜로
줄었어요'…. 낄낄거리며 재밌게 보았지만 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큰 스크린에 바삐 넘어가는 자막을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림만
보고 자막은 포기한건 아닐까? "너 자막은 다 읽었니?"라고 물어보면
애가 "응, 다 읽었어"라고 말하면 믿어주는 척해야 하나? "다 못
읽었어"라고 하면 "아직 그것도 못 읽냐?"라고 해야 하나? 우리
애들은 왜 노랑머리 주인공을 통해 영화에 눈을 떠야 하는가.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불쾌하다. 그래, 자막 안 읽어도 되는 우리나라 애들이
나오는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야지.
그래서 '키드캅'이라는 어린이 영화로 데뷔를 했다. 영화 포스터
만드는 일만 하던 내가 의욕만 앞서서 연출부 경험도 없이 무모하게 일을
쳤다. 1993년 7월 17일. 스필버그와 '맞짱을 뜨겠다'며 '쥬라기
공원'과 같은 날 개봉해서 결과는 처참한 실패. 영화 한 편에 여러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그때 나를 믿고 밀어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쳤다. 부끄럽다. 나에게 많은 양분을 주셨던 여러 선배님들에게
죄송했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붉어진다. 반성해야 한다. 젊은 날의
도전정신은 아름답다? 웃기지 마라. 무모한 시도는 진화를 더디게 한다.
그 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기회마저 나로 인해 박탈당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나의 영화 동지들과 6년의 수련 끝에 조철현과 '간첩 리철진'
초고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 제작자 역할로 방향을 잡았다.
'아나키스트' '공포택시' '달마야 놀자'까지 성공과 실패를 맛보며
영화가 무엇인가를 배워왔다. 그래, 영화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구나. 오늘 이 현장에서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며 나중에 화석이
되어버릴 배설을 하는구나. 인간은 먹은 만큼 쌀 수 있다. 아는 만큼
느낄 수 있다. 느낀 만큼 말할 수 있다. 속일 수 없다.
'키드캅'은 몇 안 되는 어린이 영화라 케이블 TV에서 아직도 수시로
방영한다. 얼마 전에 또 누가 봤다고 한다. 나는 10년 전 시사회 이후
한번도 보지 않았다. 부끄러운 배설물이라는 느낌을 아직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뷔작이 바로 은퇴작이 된 수많은 감독들의 마음을
나는 안다. 냉정한 것이다. 그래서 내겐 이런 좌우명이 있다. '실패
없이 성공 없다'. 언젠가는 어린이영화의 대표작을 내가 꼭 찍으리라.
'키드캅'에서 같이 작업했던 연기자 정태우와 김민정이 이제 어른이
되어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 얼어 있던 마음이 이제 풀리는 거
같기도 하다.
요즘은 10년 만에 감독 재기작 '황산벌'을 다음 달에 크랭크 인하려고
준비 중이다. 영화 인생 18년 만에 만든 두 번 오지 않는 기회다. 나를
믿고 밀어주는 같이 작업하게 된 팀들이 있어 정말 고맙다. 올 가을 개봉
날 '황산벌'이 매진되면 극장 앞에서 피우려고 아껴둔 시거 담배
냄새가 향긋하길 바란다.
(이준익 ·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