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스탈린그라드의 폐허가 된 시가지에 주둔한 독일군의 모습.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유한수 옮김/지식의 풍경/2만원)

잠시 '2차대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당신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덩케르크 철수와 독일군의 파리 입성, 런던
대공습과 북아프리카 사막의 전차전, 노르망디 상륙과 시칠리아 상륙,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전쟁은 대부분
미국-서유럽의 연합군과 독일과의 전쟁이었다. 많은 영화와 TV드라마들도
그 이미지를 계속 재생산해 왔다.

과연 그런가? 조금만 '미국적인 관점'을 벗어나도 '사상 최악·최대의
전쟁'은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4년 동안 전개된 독·소(獨蘇)전쟁, 나치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전쟁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는 대량 살육전으로
치달았다. 소련 측 사망자만 2700만명이었고, 2차대전 중 죽거나 다친
독일군의 80%가 여기에서 쓰러졌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죽은 러시아인
50만명은 영연방 전체 사망자보다 많았다. 독일군의 군사력이 집중된
곳은 동부전선이었고, 노르망디 작전은 이미 소련과의 전쟁이 패전으로
기울어진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전후 냉전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잊혀지고 뒤틀려졌다.

글라스노스트 이후 공개된 많은 자료에 빚진 이 책은, 1997년 영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제작한 10부작 다큐멘터리를 그 저본으로 삼고 있다.
10장으로 나눈 연대기적 서술을 통해 양 세력의 갈등과 회담의 추이부터
독일군이 연전연승하는 바르바로사 작전, 레닌그라드 봉쇄, '부글부글
끓는 솥'으로 표현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소련군의 반격과 전세를
역전시키는 쿠르스크 전쟁, 종전과 스탈린 체제의 재확립까지
그려나간다. 거시적인 전쟁의 추이와 구체적인 묘사, 통계수치를
종횡으로 넘나드는 시각 속에서 전쟁의 실체는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히
드러난다.

그 모습은 담담한 문체 속에서 더욱 참혹하다. "백러시아의 독일군
제707보병사단은 소속 부대원 두 명을 잃은 앙갚음으로 한 달 동안
파르티잔(으로 의심되는 주민) 1만431명을 쏘아 죽였다(203쪽)"는
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시 생산을 위한 노동과 부역, 고문으로
서서히 죽어 갔다고 이 책은 말한다. "전 세계의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의 고통을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저자는 대담하게도 '스탈린에 대한 복권(復權)'을 시도한다. 소련이
독일에 승리했다는 역사적 수수께끼의 해답에는 그의 '흔들림 없는
지도자'라는 이미지와 군사 전문가들에게 고개를 숙인 유연함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련 대중에게는 애국심과 타고난 인내심이 있었고,
체제와 그 체제에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세력이 위기 상황 속에서
일시적으로 결합해 불완전하게 공생했다는 것. 아무래도 독·소 전쟁
자체가 생소한 우리에게는 모두 흥미로운 해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