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朴景利·77)는 삼단 머리를 끊고 기다리고 있었다. 6일 경칩.
아침부터 날린 눈발이 발목에 와 닿는다. 원주시 토지문화관의 안채를
찾은 박완서(朴婉緖·72)는 먼저 선배의 용태를 살핀다.
"글 쓰는데 자꾸 머리가 당겨서 못 견디겠어. 그래 잘랐지. 아예
삭발해버릴까도 생각했었어."(박경리)
"참 이쁘게 자르셨네요. 저는 미싱으로 옷은 많이 지었지만 제 머리를
직접 잘라 보진 못했어요."(박완서)
박경리와 박완서. 자매처럼 다정히 앉았으나, 실은 문자 그대로 "한국
문단의 두 거목"이다. 나이로 보나 업적으로 보나 그리고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열정으로 보나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별같은
존재들이다.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 완간 이후 근 10년 만에 장편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월간 현대문학 4월호부터 연재한다. 전전날
그녀는 1회분 초고 155장 분량을 넘겼고, 이날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이
초교 교정지를 들고와 옆에 앉았다. 박경리 딸 김영주씨(시인 김지하의
부인)가 커피를 내온다.
"1년 쉬면 1년만큼 고이고 3년 쉬면 3년만큼 고이지. 이번엔
10년만큼이겠지. 내 그랬어. 이 소설만 마칠 때까지 신령님 내좀 살려
주이소."(박경리)
한달 동안 점심으로 내리 떡국만 먹은 게 체한 탓에 혈압까지 220을 넘어
식구들을 긴장시켰던 뒤끝이다. 이 소설은 12만 평 농장을 가꾸고 있는
작중 여인 박해연(朴海燕·38세)과 그녀의 남편 황석호(52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다. 가상 공간인 안생군 양광면 금오리를 배경으로
호텔과 골프장을 내세운 개발 세력들, 이에 맞서는 인물들의 환경 사랑이
펼쳐진다. 여기에 박씨 문중과 안씨 문중 사람들이 '육이오, 사일구,
군사혁명, 광주의 대학살'(본문)을 지나면서 '윤리라는 녹지대는
말라죽는데 세상은 바야흐로 사막의 달밤'(〃)이 돼가는 세태를
그려나간다.
"이젠 돈도 명예도 필요 없을텐데 왜 또 쓰냐고? 여기까지 온 건
자의라기 보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온 거야. 전에는 글 한줄에도 용을
써야 했는데, 지금은 글 쓰는데 그런 강퍅(剛愎)을 부리지 않아도 술술
흘러나와."(박경리)
“오래 쉬셔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또 쓰시니 너무 좋아요.”(박완서)
"글 쓰는 것은 에고이즘이야. 그 핑계로 친구까지 버렸지. 진정한
봉사와 희생이란 자신의 고귀함까지 내던지는 거야. 중국 사람들 보면
권세에 눌릴 땐 온갖 추한 짓을 마다 않고 목숨을 보전했다가 풀려나면
또 일하잖아. 그런데 어제는 정말 죽을 것만 같더라고. 내가
원보(30·외손주·소설가)에게 전활 걸었어. 아무 것도 못해놓고 이제
떠나면 어떡하냐고."(박경리)
국내 여론조사에서 늘 '노벨문학상 후보 1위'에 오르는 박경리가 아무
것도 못해놓았다니? 선배의 지칠줄 모르는 창작 욕구에 후배의 농담
한마디가 좌중을 웃음바다로 빠뜨린다.
“아유 더 해 놓고 가시면 어떡해요.”(박완서)
'나비야 청산가자'에서 '청산'은 소아마비 장애인인 주인공 해연이
자신의 영혼을 해방하는 곳을 상징한다. 해연(海燕)의 한자 풀이는
'바다제비'인데, 모든 새들 중 북극에서 남극까지 가장 멀리 날아가는
새다.
"이 소설은 환경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해. 아름다운
곳이 파괴되는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문제야. 다음 연재분부터 일본 비판, 지식인 문제, 이데올로기 문제도
많이 집어 넣을거야."(박경리)
원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완서도 요즈음의 지식인들에 대한 느낌을 언뜻
내비쳤었다. "일부 신문 칼럼 중에는 악취가 풍기는 글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들 자신만만한지. 글에는 문향(文香)이 있어야지요. 지금은
온건한 다수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야지요. 그러나 겁나는
일이에요."(박완서)
박경리와 박완서는 문인들 얘기, 토지문화관 근처의 수려한 풍광에 관한
얘기, 그러다 창밖에 눈길을 주며 "눈발이 굵어지네 못 돌아가면
어떡해" "자고가면 되지" 하다가, 얘기 재미에 도취되는 것만으로는
더이상 시장끼를 속일 수 없을 때쯤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메밀부침과 도토리묵을 앞에 놓는다.
"바람·태양·물이 필요 없는 게 바로 물신(物神)이야.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존재요 우상이지. 그런 세상이 안오길 바라지만 현대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어."(박경리)
"선생님이 걷어내고 있는 땅속의 비닐도 문제지만, 요즘 아이들이
공중에 띄우는 고무 풍선도 어디까지 올라 가다 터지면 새들이 그것을
먹고 기도가 막혀 죽는대요. 또 인간이 노동은 안하고 즐기기만 하는
세상도 한심해 보이고요. 우선 나부터도 정교한 로봇이 나와 부엌일을
조금 부렸으면 하니까."(박완서)
다시 소설가 겸 전 연세대 교수인 마광수를 걱정하고, 뮤지컬 연출가
김민기가 새로 발견한 인근의 산책로를 떠올리고, 재작년 한 젊은이가
박경리에게 옥돌 장식으로 만든 빗을 바쳤다는 얘기로 이어져, 대화는
얼마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와 현재 와병중인 시인 조병화에 이른다.
"주변이 너무 적막해. 다 떠나고 없어. 이걸 모르고 젊은 작가들이
지면이 없다 싶으면 자꾸 정치적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생명력을 오래
가져가야 해."(박경리)
박완서는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혈압약을 소개하며 "아무쪼록
건강하시라"고 당부한다. 박경리가 "옛 여인들의 사회생활이 살얼음
밟듯 했고 그땐 나도 너무나 낯가림이 심했다"면서, 그러나 "모시
저고리 속에 훤히 보였던 감춰진 관능미"가 있었다고 말하자, 박완서도
'섹슈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업'시킨다.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서울 여인네들의 속곳이 있는데 열두 겹으로 겹쳐 있지만 앞섶은 묘하게
벌려 있어요. 얼마나 야한지 몰라요."(웃음)
그들은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어 했다. '토지'도 원래는 일년 정도 연재
예정이었나 종국에 24권짜리 '대하(大河)'가 됐다. 이제 '토지'의
뒤를 잇는듯한 내용의 '나비야 청산가자'도 일단은 "한 일년
해보자"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