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981~997년 재위)이 즉위했을 때, 스물을 갓 넘긴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다. 새 나라 고려가 들어선 지 60여년. 여섯번째 임금인 성종의
어깨위엔 태조 왕건과 광종이 단행한 개혁을 마무리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즉위 후 먼저 언로를 틔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5품 이상의 모든 관료에게 국가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한 것. 선두주자는 최승로였다. 그는 광종(949~975년 재위)의 개혁에
대해 서릿발 같은 평가를 내렸다. "광종집권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습니다.… 화풍(華風·중국문화)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화사(華士;중국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습니다."
최승로의 지적과 같이 성종은 철저하게 광종 개혁의 청산과 계승이라는
역사적 성찰과 반성 위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이
지나친 중국화와 함께'이곳 저곳에서 모여든 얼치기', 즉'남북용인
(南北庸人)'이라 표현한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이나 신진기예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개혁 주도세력의 인재 풀은
빈약했고, 그나마 사회 주도세력도 아니었다.
더욱이 광종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경험이 풍부한 이른바'구신숙장
(舊臣宿將)'을 철저하게 제거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천 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4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른바'토사구팽(兎死狗烹)'의
개혁이었다. 지지받을 수 없는 개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성종의 성공은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 때문에 가능했다.
광종은 개혁에 반대한 지방출신 관료집단을 대대적으로 제거했는데,
이 덕분에 성종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성종의 개혁정치는 태조 왕건과 광종, 경종을 거쳐
진행된 고려초기 국왕 주도'개혁 프로그램'의 완성을 의미한다. 개혁은
내가 아니면 안되며, 내가 집권하는 동안에 완성해야 한다는'개혁
독점론'과'개혁 조급증'은 역사의 순리가 아님을 지나간 역사에서
읽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자 28가지 조항의 개혁안'시무 28조'를 올린 최승로를
재상에 등용했다. 그의 발탁을 계기로 유교 관료집단이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당시의 중국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춘 최고의 문화 국가였다.
이들은 중국을 통해 유교 정치제도의 도입 등 법과 제도의 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3성 6부체제 등 정치제도를 갖추고, 인재 양성과 발굴을 위한
학교와 과거제도는 물론, 빈민 구제와 물가 안정을 위한 사회제도도
정비했다.
그렇다고 성종이 우리 것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삼았다. 즉위 직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의 벼슬을
내렸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광종 때의 원로 정치인. 그는 광종이
귀화인 쌍기 등에게 저택을 주고 혼인을 주선하는 등 지나치게 우대하자,
차라리"내 집을 그들에게 주라"고 하면서 광종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성종 개혁정치의 특징은 최승로와 서희로 상징되는, 정치이념이
다른정치집단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종만이 가질 수
있는 리더십이었다. 이념이 다른 정치집단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룰 경우, 개혁은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한다. 특정 집단에 의존하지
않은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은 법과 제도의 개혁을 통해 고려왕조를
정상궤도에 올려 놓았다.
성종대 정치의 최대 위기는 재위말년인 993년(성종 12)에 일어난 거란의
침입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강국 송나라와 거란은 영토분쟁으로 전쟁
직전에 이르렀고, 그 여파가 고려에 미치기 시작했다. 거란은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먼저 고려를 침공했다. 80만 대군을 동원한
거란군사의 위세에 눌린 유교 관료집단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거란에
항복하자고 했다. 성종이 동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서희를 비롯한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은 먼저 외교적 담판을 벌여 거란의 침략의도를 안 뒤에
항복해도 늦지 않다고 건의했다. 성종은 서희의 주장을 따랐다. 담판 결과,
서희의 판단이 옳았다.
거란의 침략의도는 장차 송나라 정벌을 위해, 고려와 송의 동맹관계를
사전에 차단하여 후환을 없애려는 데 있었다. 외교적 담판을 통해 이를
파악한 고려는 거란과의 국교정상화 조건으로, 거란으로 가는 길목에
여진족이 점유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의 반환을 요구했다.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는 국경선을 압록강까지 확장하는 실리를 얻으면서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다양한 정치집단을 우군으로 끌어안고 그들의 목소리를 끝까지 경청한
성종의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다.
물거품이 될 뻔한 법과 제도의 개혁은 계속됐고, 고려 왕조의 안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시기든 대내외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최고
경영자의 리더십이 어느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성종의 개혁정치는
보여주고 있다.
(박종기 교수 j9922@mail.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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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王, 고려 태조·조선 정조
실패한 王, 고려 숙종·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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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사회에서 절대권력을 지닌 군주 한 사람의 판단은 왕조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 현대 기업에서 CEO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지만,
한 왕조의 최고경영자에 견줄 수 있을까?
성공한 군주의 첫 걸음은 왕조의 현안을 정확하게 파악, 명확하고 지속
가능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만주족후금과 이를
견제하려는 명나라간의 틈바구니에서 실리위주의 등거리 외교 노선을
추구한 광해군은 전쟁의 참화를 막은 성공한 군주였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정책 운영과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능력은 성공적인 군주의 또 다른 덕목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연고주의를 뛰어넘는 인재 등용은 정책 자체가 사심없이 입안되고
공정한 원칙 위에서 운영될 수 있는 바탕이다. 능력에 따라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옛 3국의 인력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왕조
중흥을 시도한 조선의 정조는 바로 이런 자질을 가진 CEO였다.
그렇다면 실패한 군주는 어떤 모습일까? 설득력없는 개혁은 실패로
귀결한다. 제 아무리 취지가 좋고 참신하더라도 관료집단이나 민심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정책은 실패한 군주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고려 숙종은
문벌집단의 득세와 여진족의 압력으로 위기에 빠진 왕조를 구하기 위해
부국강병의 정치를 시도했으나, 밑으로 부터의 동의를 얻지 못해
실패하였다.
내치(內治)가 뒷받침되지 않은 외치(外治)는 모래 위의 집이나 다름없다.
충선왕은 당시로선'글로벌 스탠더드'인 원나라의 법과 제도를 통해
내정개혁을 시도했다. 하지만 충선왕의 외치 위주의 정치는 백성들의 토지를
제멋대로 빼앗고 관료집단의 인사를 독점한 측근집단을 다스리지 못한
내치의 실패로 물거품이 됐다.
◇성종 연보
▲960년(광종11) 태조 왕건의 일곱째 아들인 대종(戴宗) 욱(旭)의
둘째아들로 출생. 광종의 조카
▲981년(경종 6) 고려 6번째 왕에 즉위.
▲982년(성종 1) 3성 6부제 도입 등 정치 개혁 단행. 6월 최승로가 시무
28조 올림
▲983년(성종 2) 12목(牧)에 지방관 파견
▲986년(성종 5) 빈민 구제기관인 의창 설립
▲987년(성종 6) 노비환천법(奴婢還賤法) 제정, 팔관회 폐지
▲993년(성종 12) 거란군 고려 침입.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화약
체결
▲994년(성종 13) 송과 외교 단절. 압록강 이동에 6성 설치 시작
▲997년(성종 16) 10월 타계. 500년 고려왕조의 국가 기틀을 완성한
임금으로 평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