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문은 피해자들이 그것으로 죽은 경우가 아니면 겉으론 멀쩡하다는 데 특징이 있다.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공포로 피해자들은 심신(心身)이 함께 무너진다. 물고문을 ‘후진국형’ 고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현대사에서는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에게 처음 물고문이 행해졌으며, 군부독재 시절에는 각종 공안사건 조작 과정에서 물고문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물고문은 사람을 거꾸로 매단 뒤 고춧가루를 탄 물을 주전자에 담아 코에 들이 붓거나, 호스를 통해 강제로 물을 먹이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1987년 박종철군 사건처럼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머리를 담갔다 빼는 행위를 반복하는 방법도 사용됐다.
박종철군을 부검했던 고려대 의대 황적준(법의학) 교수는 “물고문을 받으면 호흡을 못해 고통스러운 것과 함께, 혈중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정신착란과 어지럼증 현상이 일어난다”며 “이로 인해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해 고문의 효과가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또 “외부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폐와 기관지에 물이 들어가거나 내장기관이 손상되는 등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실제 피해자들도 각종 기록과 증언을 통해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몽롱하고 기억이 흐릿해져 헛소리를 했다”며 “여러 고문 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 물고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1974년 ‘인혁당 사건’은 물고문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얼마나 파괴시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인혁당 사건을 재조사했던 의문사위 조현조 전 조사관은 “관련자 대부분이 물고문을 당했으며, 폐농양증 등 후유증을 앓아 폐에서 피가 나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종철군 사건 이후 물고문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일선 수사관들은 물고문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조직폭력·마약 등 강력사범에 대해서는 일선 경찰과 검찰에서 고문과 구타가 행해지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현재의 자백 위주의 수사시스템에서는 언제든 각종 고문이 행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일선 경찰서 강력반의 한 관계자는 “상부에서는 인권과 과학수사를 강조하지만 사람 죽인 조폭이 ‘아니다’라고 버틸 때는 고문의 유혹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경실련 고계현 실장은 “형사범들은 고문을 받아도 자신의 약점과 고문 입증의 어려움, 검찰의 보복 우려 등에 대한 부담 때문에 고문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