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재학'하면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며 꽉 다문 입술로
검은 장포를 휘날리는, 점박이 검객 '추공'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추공'보다는 '시라소니'가 먼저다. 7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 만화계에는 성인 만화가 붐이었던 적이 있었다. 강철수, 박수동
류의 건전한 성인 만화는 그 후였고, 작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김일성의 밀실'같은 반공만화를 빙자한,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만화들이 한 때 유행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런 만화들이 당시의
대본소에 버젓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나는 불과 열네 살 때 하드보일드한
성인물들을 좌악 섭렵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호시절(?)은 곧 당국의
철퇴를 맞고, 갑자기 성행했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뒤를 이은
성인물들이 강철수와 박수동이었다. 그러니 섹스의 언저리만 맴도는 그런
건전한 성인만화들이 내 눈에 찰 리 없었다. 그 때 내 관심을 돌린
만화들이,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자유당 시절을 배경으로 김두한,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의 활약을 그린 협객만화였다. 특히 김두한은
만화를 벗어나 당시의 만화당 키드들에게 협객의 진정한 표본으로 우상시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재학의 『시라소니』가 있었다.
이재학이 자유당시절의 깡패들 중에서 특히 '시라소니'에 주목했다는
것은 이재학 만화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유당 시절
김두한 패거리와 이정재 패거리로 양분된 당시의 구도 속에서
'시라소니'는 그 어느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고 홀홀단신으로 만주와
한국의 주먹계를 평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라소니'의 고독한
캐릭터가 무협으로 넘어가면서 그대로 '추공'의 캐릭터를 이루게 된다.
이재학 무협물의 주인공인 '추공'의 특징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추공'의 얼굴에 난 커다란 점인데, 그건
다름아닌 '시라소니'의 실제 얼굴의 특징이다. 원래 이름이 이성순인
'시라소니'의 얼굴에는 커다란 점이 나있었다고 한다. 그 점을
이재학이 그대로 그려냈고, 그것이 '추공'의 캐릭터에도 이어진
것이다.(나중에 이성순씨는 그 점을 손톱으로 파서 빼버렸다고
한다.-만화에는 그렇게 나와 있다.) 그렇듯이 이재학의
만화『시라소니』는 주로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던 영락교회
이성순 장로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이다.
이재학은 이 만화에서 "공중걸이 박치기"라고 알려진 '시라소니'의
주특기를 유감없이 그려낸다. 꽉 다문 입술로 적을 노려보다가 몸을 날려
박치기와 무릎치기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장면은 특히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와의 싸움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제로 '시라소니'의 40대에
이루어진 이 싸움은 주먹 패거리들 사이에서는 신화로 전해온다고 한다.
이 만화 때문에 만화당 키드들은 분열되었다. "야, 우리 나라에서
제일로 쌈 잘하는 사람이 누구게?" "김두한!" 그러면 나는 만화에서
본 흉내로 상대방에게 조용히 몸을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시라소니야."
(함성호/시인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