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열기가 식지 않은 채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꿈꿉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나자마자 불붙기 시작해서,
'중세의 연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처럼 고통을 이겨내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다가, 마침내 그리스 신화 속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키스처럼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나는, 그런 신화적 사랑 말입니다.
지난 몇년간 충무로에서 이런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아마도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일 겁니다. 그 아름다움과
강렬함으로 '번사모'(번지점프를 하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모임까지 낳은 이 작품은 첫눈에 반해 영원으로 가는 사랑을 그려냅니다.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태희를 잃은 인우가 십수년 뒤 자신이 가르치는
남학생 현빈으로 환생한 그녀를 알아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지요. 우여곡절 끝에 서로를 확인한 인우와 현빈이 다음 생의 만남을
기약하며 고지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찰나로 영원을 말하고 티끌로 태산을 약속하는
현실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냉소하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으로 태희와 함께
밤을 보내던 초라한 여관방에서 인우가 "난 다시 태어나도 너만
찾아다닐거야"라고 말한 뒤, 영화의 전개는 그 맹세의 무게를
곧이곧대로 저울에 다는데 주력한다고 할까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영원한 사랑을 말씀하셨지요. 영원을 약속할 때, 그 무게를 아시나요?"
그 말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세상의 모든 오래된 연인들을 생각할 때, 이
영화는 운명적 사랑을 찬양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운명을 걸 수 없으면서
말로만 거론하는 현실의 사랑을 탄식하는 작품일 수 있는 거지요.
사랑의 밀어만큼 인플레이션이 강한 분야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감정을
약속한다는 건 얼마나 무모한지요. 사랑이란 내게나 상대방에게 있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내가 변하지 않아도 상대가 변할
수 있고, 상대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변할 수 있으며, 둘 다 변하지 않을
때 그 사이에 놓인 세월이 변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 영화의 사랑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절정 직전에
포말로 부서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인우가 입대하러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태희가 교통사고로 숨졌으니까요. 영화 속 그 직전 장면이
첫 밤을 보내며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는 것도 그
사랑이 얼마나 안타까운 순간에서 끝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마릴린 먼로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을 때, 9개월 전 이혼했던 작가
아서 밀러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지요. 반면 그녀와의 재결합
결혼식을 며칠 앞뒀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그로부터 20년 넘도록
매주 그녀 무덤에 꽃을 바쳤고요. 한껏 달아올랐을 때 중단된 열정의
강렬한 여진과 권태만 남기고 끝나버린 열정의 뒤끝이 극적 대비를
이루는 사례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주인공처럼 절정에서 사랑이 식을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래저래 사랑은 영원을 바라보는 순간의 역설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