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 여행기(전2권)
이븐 바투타 지음·정수일 옮김·창작과 비평사
모로코 출신의 아랍인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가 동방을 향해
떠난 것은 1325년,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애당초 그는 이슬람 신도들이
지켜야 할 믿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집트를 돌아서 아라비아
반도로 들어간 그는 마침내 감격에 찬 순례를 마쳤지만 그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메카에서 바그다드로 귀향하는 이라크 순례단에
합류하면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편력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1353년 자신의 고향 모로코로 돌아와 정착할 때까지 무려
27년의 세월 동안 그의 족적이 미치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동일한 길로는 두 번 여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으며, 비잔티움 제국 통치 하의 콘스탄티노플에서부터 대륙의 동쪽 끝
중국에 이르기까지 육로와 해로를 불문하고 지그재그로 다녔으니, 그가
여행한 거리는 모두 12만㎞를 넘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북경까지의
직선거리를 약 1만㎞라고 잡았을때,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6번 왕복한
셈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빚어낸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만큼 세상 여러 곳을 널리 돌아다닌 사람은 없었다고 호언했던
마르코 폴로의 성취조차 이븐 바투타의 장도에 비하면 차라리
'보름달' 옆에 있는 '뭇별'과 같다고 한 역자 정수일 박사의
비유(옮긴이 서문, 6쪽)도 수긍이 간다.
고향 모로코로 돌아온 이븐 바투타가 군주의 칙명을 받아 1355년 완성한
여행기 원본은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이를 토대로 당대의 문필가 이븐
주자이가 원문을 윤색하고 다듬어 다음해 완료하여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흔히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목은
'여러 지방과 여로의 기사이적을 본 자의 진귀한
기록'(수방편답기문보록)으로, 동서를 막론하고 중세 여행기들 중에서
백미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븐 바투타가 온갖 가난을 무릅쓰고 답방했던 세계 여러 곳들의
진기한 풍토·민족·관습 등이 소상하게 소개돼 있어 일종의 풍물지를
방불케 할 뿐더러, 중요한 왕국들을 통치하던 군주들의 치적과 비행,
귀족과 관리들의 사치와 비리들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어 14세기 전반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가문 대대로
학자·법관을 지냈던 그는 각지의 무슬림 현자들의 학식과
수피(신비주의자)들의 경건한 생활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여행기'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다니며 반평생을
보낸 한 인간의 놀라운 성취의 기록이자 동시에 그의 눈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 중세 세계의 투영이다.
이같은 인류 불후의 고전이 정수일 박사의 각고에 걸친 노력 끝에 이제
우리 말로 옮겨져 빛을 보게 됐다. 역자 자신의 기구한 인생 도정에
대해서는 재언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말 그대로 한증탕 같은 여름철,
더덕더덕 땀띠 돋아난 엉덩이를 마룻바닥에 붙이고 하루 열댓시간씩
뭉개면서"(옮긴이 후기, 428쪽) 번역을 해나간 불굴의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접하기까지 몇십년을 더 기다려야
했을 지 모를 일이다. 영어의 몸으로 혼신의 힘을 쏟으며 이를
완성한 역자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드릴 뿐이다.
이븐 바투타의 역정이 길고 다양했던 만큼 그의 '여행기'에 등장하는
인명과 지명 역시 낯설기 그지없다. 소수의 전문가를 빼놓고는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도 자주 등장하지만, 역자는 그럴 때마다 독자들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친절하고 상세한 주식을 덧붙였고, 권말에 첨부된
'인명·지명·사항 찾아보기'는 그러한 배려를 한층 돋보여준다.
원문의 난해함 때문에 구미 선진국에서조차 완역은 좀처럼 시도되지
못했고, 프랑스어판(전4권, 1853~1858)에 이어 영어판이 무려
36년(전4권, 1958~1994)의 세월이 걸려 근자에 들어와서야 완결될
정도였다.
두 권으로 나뉘어져 도합 1000쪽이 넘는 이 한국어 완역본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낯설게 여겨져 왔던 이슬람 세계는 우리에게 한층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나 고전이란 결코 쉽게 읽히는 글만은 아니다. 이븐
바루타의 '여행기'에 나오는 낯선 미지의 세계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그의 인내와 고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속에
그려진 중세 무슬림 사회의 진정한 모습, 즉 종교적 경건과 미혹, 정치적
야망과 잔혹함, 인종과 언어를 뛰어넘는 형제애 등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오늘날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슬람'의 문제를 단순히 시사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역사·문화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김호동·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