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적 참담함이 뉴욕과 워싱턴을 뒤덮었다. 아직 사건의 배후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들은 이슬람 무장세력이
개입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뉴요커들의 절규와 교차되어
전해지는 일부 이슬람인들의 섬뜩한 환호성은 이러한 심증에 무게를
더해준다.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는 정녕 문명충돌의 시대로 치닫고 있는
것인가.

1989년 5월 '월 스트리트 저널'이 "우리는 이겼다(We Won!)"라고
썼을 때, 그것은 레이건행정부의 대소 봉쇄전략이 거둔 승리에 대한
찬양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에서는 그것이 과연 인류의 승리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인가를 궁금해했지만, 세계화된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진 뉴욕
맨해튼의 오늘 참상은 과연 미국마저도 진정한 냉전의 승리자였던가를
반문하게 만든다.

냉전은 일찍이 레이몽 아롱이 표현했던 것처럼 "불가능한 평화와
불가능해보이는 전쟁"의 공존상태였다. 냉전은 끝났지만 아롱의 표현과
반대되는 "가능해보이는 평화와 불가능한 전쟁"의 시대가 오지는
않았다. 반세기 전 한국의 6·25전쟁과 더불어 봉인되었던 세계적
냉전구조가 무너진 곳에서 걸프전쟁과 함께 시작된 탈냉전국제질서의
모습은 냉전시대의 미국민들조차 경험하지 않았던 참상을 빚어내고 만
것이다. 인류는 진정 냉전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냉전종식 이후 미국에서는 종전의 봉쇄전략을 대신하는 문명충돌론이
개진되었다. 헌팅턴은 향후 미국의 적대세력으로서 "유교·이슬람
커넥션"이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대서양문명연대론을 개진했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탈냉전시대의 분쟁양상을 단순화된 도식으로
설명해주는 명쾌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적을 지목한 전략이었을 뿐, 경쟁자였던 동시에
세계경영의 분담자이기도 했던 소련이 없어진 탈냉전의 세계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관한 성찰은 아니었다. 문명충돌을 증빙하기
위한 사례들은 최대한 나열되었지만 어떻게 문명충돌을 넘어 문명 간의
이해와 문명 간의 교류, 그리고 문명 간의 융합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관한 고민은 빈약했다. 문명의 충돌이든 문명의 융합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탈냉전기를 맞이하면서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정작 미국에
들어가면 세계가 없어지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보통의 미국민들은
국제문제에 너무도 무관심했고, 그러한 미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들의 정책은 문명적 융합을 통한 국제적 표준의 수립이 아닌
미국적 표준의 세계화라는 일방주의의 함정에 빠져들었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자기성취적 예언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인들이 아메리카원주민들에게 손도끼 등을 주고 구입했다가
영국에 넘겼던 뉴욕의 맨해튼은 콜럼버스의 대서양횡단 이후 이룩된
대서양문명의 번성을 상징했다. 일찍이 이슬람세계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간직했다가 서유럽에 전해주었듯이 맨해튼은 비단 미국인들의
것만이 아니라 서유럽인들의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또한
아메리카원주민들과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의 피땀이 서리고,
아시아인들의 애환이 서린 전 인류의 유산이다.

맨해튼과 그것으로 대표되는 미국 자체가 문명충돌의 현장이었던 동시에
문명융합의 장소였던 것이다. 미국의 패권이 다른 서유럽국가들의
패권처럼 쇠퇴하지 않았던 이유도 미국이 과거 패권국가들의 성취를
흡수해냈던 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분노와 슬픔에 포효하는 미국민들이
문명충돌론을 넘어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문명적 융합에 기초하여
판단해주기를, 그리하여 결코 이슬람문명권 전체를 적으로 만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그것이야말로 반인륜적 범죄를 인류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궁극적 응징책이며, 미국이 전 인류와 함께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길이다.

(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