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가꾸기' 26년…보도엔 그림, 길가엔 조각품 ##
빌딩 숲 뒤편 주택가 도로변에 주민들이 손수 가꾸어 낸 나무와 꽃들이
늘어서 있다. 길 옆에는 맑은 실개천이 흐르고, 보도에는 동네
초등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새긴 타일이 깔려 있다.
인구 80만명이 사는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 구 산겐자야 지역의
'가라시야마가와 녹도'의 모습이다. 4.6㎞에 이르는 이 도로가 과거에는
주민들이 내다버린 온갖 쓰레기로 뒤덮였던 버려진 하천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세타가야구 당국은 80년대 들어 하천 정비에 나섰다. 정비계획 초안은
구가 만들고, 구체적인 계획은 주민들에게 맡겼다. 주민들은 당장
주민협의회를 만들고 전문가를 초빙했다. 그 결과 당초 직선으로 돼 있던
계획안은 옛 하천부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따라 굴곡 형태로 바뀌고,
사라졌던 하천도 실개천으로 부활했다. 바닥 타일에 자녀들의 그림 넣기,
자기집 주변에 나무와 꽃 심기 등 다양한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능동적
참여에 구 정부의 호응이 어우러져 88년 완성된 이 거리는 이후 도쿄의
'역사문화 거리'로 지정됐다.
세타가야구에는 이렇게 주민들이 제안해 만들어진 공간들이 이곳 저곳에
있다. 쓰루마키(넝쿨) 지역의 '넝쿨 산책로'가 대표적 케이스.
초등학교를 끼고 있는 이곳 주민들은 학교 주변을 어린이들의 환경·생태
교육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토끼장·닭장은 학교 경계선 안팎으로
통하도록 해 어린아이와 엄마들이 찾는 단골 장소가 됐다. 가로등과
음료수대는 폐자원화 한 상수도관으로 만들었다.
세타가야 미술관에 어울리게 길가에 조각작품을 배치한 요가지역, 주택가
곳곳의 쌈지공원(빈터를 이용한 공원), 버스정류장, 전신주, 공공화장실,
공중전화부스 등 어느 곳 하나 주민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주민들이 나서 만든 곳의 사후관리는 주민들이 직접 하는 것이 당연시돼
있다.
물론 처음부터 주민들이 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이랬다.
"70년대에 공해와 자연파괴 문제 등으로 개발에 대한 주민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주민과 구 정부 간의 마찰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타협이 시작됐고 그 결과 주민의 '마을 만들기'(마치즈쿠리)가
생겼습니다." (오리토 유지 전 세타가야구 마치즈쿠리 센터 소장, 현
세타가야구 부참사)
첫 '마을 만들기' 사업은 75년 세타가야구 타이시토 지역의
'목조주택 재정비 사업'. 낡고 혼잡한 목조주택지역 재정비 사업을
구가 추진했다. 하지만 재산상의 손실 등을 걱정한 주민들의 반대로
사업은 난관에 봉착했다. 지지부진하던 5년이 흐르고, 구는 『그럼
여러분들이 스스로 재정비 안을 만들어보세요』라고 제안했다. 처음
자기들끼리 고민하던 주민들이 구 당국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했다. 그
과정을 거쳐 주민들이 안을 내자 구는 그 안을 그대로 따랐다. 무리 없이
사업이 추진되자 일본 전역이 주목했고, 각 지방정부들은 세타가야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세타가야구가 '주민들의 마을 만들기' 사업의
효시가 된 셈이다. 당시 이 사업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담당과장
야토지씨는 현재 동경도 부시장이다.
지난 26년 간 세타가야구에서 주민 제안으로 이뤄진 사업은 수천 건.
이제는 주민이 구에 제안할 일이 있으면 주민협의회를 구성해 주민
합의를 거치는 등의 절차도 확립했다. 주민제안 제도는 1980년
도시계획법에 명시됐고, 세타가야의 경우 82년에 관련조례가 제정됐다.
세타가야구에는 현재 평균 5000명당 1개씩 약 160개의 협의회가 있다.
적게는 5~6명, 많게는 수십명이 모여 무슨 사안이건 머리를 맞댄다.
당연히 주민들의 민원제기는 사라졌다. 스스로 가꾸고 관리하는 만큼
애착심과 만족도가 높아진 덕분이다. 덕분에 '왕왕클럽'(개를 데리고
산책 온 사람들의 클럽) '가로등 관리 모임' 등 주민들 간의 소그룹
모임도 활성화돼 도심 전체가 활기에 차 있다.
특히 세타가야구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기구인 '마을 만들기
지원센터'를 잘 활용해 호평을 얻고 있다. 이 센터는 구 정부와 주민의
가교역할을 하는 반공공 반민간 기구. 공무원, 도시정비공사 직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주민 제안을 돕는 일을 한다. 오리토 유리씨는 "주민의
'마을 만들기' 성공 여부는 행정부가 주민제안을 얼마 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와, 주민 스스로 얼마나 의견을 조정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정책가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가꿔가는 도시.
세타가야구 주민들은 도시 속에 그들의 이미지와 마음을 직접 표현하고
있다. 회색의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신들과 함께
숨쉬는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 세타가야=황희연 충북대 도시공학과 교수 )
( 자문=경실련 도시개혁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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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타가야區는 어떤곳
미관고려 단층건물 많아…`평화도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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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타가야구는 도쿄도의 23개구 중 하나로 도쿄도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58 ㎢에 인구 80만명이 살고 있는 주거도시이다. 비교적 생활
수준이 높고 식자층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들은
낮은 단층건물 위주로 이뤄져 있어서 84년에 건축업자들이 고층
위주의 원룸맨션 건축을 시작하자 도심 미관에 영향을 미칠 것 등을
우려한 주민들이 원룸맨션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구와
주민 간에 건축협정이 체결돼 주민들의 요구가 관철됐다. 남쪽으로
흐르는 다마천외에도 몇 개의 중소 하천을 비롯한 많은 공원과
오픈스페이스가 널리 퍼져 있다. 대학과 미술관 등도 다양하게
입지하고 있어 자연적 조건과 문화적 기반이 잘 갖춰져 있는 도시이다.
지난 56년 지정된 도시 상징문양에도 평화의 의미를 넣고, 85년
8월 15일 패전기념일에는 핵무기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을 기원하면서
'평화도시 '선언을 채택하고 이를 기념하는 상징조각을 공원 내에
세우는 등 안정과 평화를 도시 전체의 모토로 삼고 있다.
(권낙우·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