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日침략정책 비판한 日人교수의 가르침 ##
나는 민족주의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선친에 이르는 가정의 분위기가 그랬고, 내가 다니던 오산학교의
분위기가 또한 그랬다. 식민통치 하에서 허덕이는 민족을 어떻게
해야 회생시킬 수 있는가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공동 관심사였다.
중학교 때 읽은 글로는 신채호 선생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있다. 이것은 낭가사상이라는 고유 사상의 성쇠에
따라 민족이 흥하고 망했다는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것이었다. 나는
이 글에 도취되어 읽고 또 읽었다. 또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글은 도덕적인
입장에서 민족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한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규정한 선생은, 신의 섭리에 의한 인류의 구원이 고난의 상징과 같은
우리 민족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같이 민족적 관점에서 출발한 나에게 학문적인 객관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한 것은 1941년 야나이하라(失內原忠雄)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그 해에 나는 일본 동경에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선친은
나를 야나이하라 선생의 지도를 받도록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의 일요일 성서 강의에 참석하였고, 뒤에는 토요학교에도 나갔다.
야나이하라 선생은 독실한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자였고, 동경대학 교수로
식민정책 강의를 담당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였고, 그 때문에 대학에서 축출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토요일마다 자택에서 소수의 학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이 토요학교였다.
나는 그 때 선생의 뜻을 백분의 일도 깨닫지 못하고 지냈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권위를 강조하는 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학문은
권력·금력·주의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되고, 진리를 진리로서 사랑하는
독립적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진리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참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즉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
흔히 말하기를 진리가 어디 있느냐고 한다. 혹은 또 말하기를 진리는
이럴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민족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무시해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기본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립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따라서 이는 곧 개인이나 민족을
파멸로 이끌어갈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진리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학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 전 서강대교수·한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