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봉걸레로 코트를 닦았다. 대전 중앙고 동기들과 함께 윤기가 날 정도로 말끔하게 만들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소년은 96배구 슈퍼리그가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리자 선배들이 뛰는 경기장에서 봉사활동으로 슈퍼리그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나도 슈퍼리그에서 최고가 될 것”이라는 다짐도 함께 닦았다.

2001 삼성화재 슈퍼리그. 훌쩍 커버린 소년의 손에는 봉걸레 대신 ‘한국 배구의 미래’라는 책임감이 쥐어져 있다.

한양대 이경수. 그는 30일 현재 공격 종합 1위를 달리고 있다. 공격 성공 250개로 2위 신진식(삼성화재·187개)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내용도 알차다. ‘거포’의 척도인 오픈공격 1위. 2차대회 중이지만 지난 대회에 이어 2년 연속 공격종합 1위가 벌써 눈 앞에 아른 거릴 정도다.

지난 29일에는 대기록도 작성했다. 자신이 지난해 세웠던 한 경기 최다득점기록(49점)을 51점으로 바꿨다. 실업 형님인 대한항공의 집중마크를 받으면서도 세운 기록이어서 의미는 더했다.

화려한 기록의 이면에는 ‘혹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주위의 우려도 있다. 한양대 공격의 50% 이상을 책임지는 기형적인 활약 때문이다. 하지만 이경수는 “재미있다”고 한다. “200개씩 때리는 연습보다 70개 정도만 하면 되는 경기가 더 편하다”고 덧붙인다.

이경수는 대전 유성초등학교 2학년 때 배구를 시작했다. 키만 장대같이 컸지 몸이 약해서 시작한 배구였다. 시각장애인인 아버지 이재원(57)씨는 약골인 아들이 운동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랬다. 어머니 김둘연(50)씨는 반대했다. 배구선수였던 고교시절 배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어버린 아픈 기억을 가진 어머니였다.

아버지와 초등학교 감독의 권유로 배구를 시작했지만 이경수는 ‘억지 춘향’ 격이었다. “매일 연습하는데 정말 재미없었어요.” 그는 중학교 때와 고교시절 힘들어 숙소를 이탈한 적도 있다. 몸이 약한 것도 이유였다. 키는 컸지만 속이 부실했다. 스트레스만 받으면 소화가 되지 않았다. 빈혈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양대 1년 때는 연습하다 쓰려져 이재구 코치의 등을 빌려 병원을 찾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안마를 하며 힘든 생활을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면 발길은 다시 코트로 향했다. 고교시절에는 스파이크 때리는 타법을 새롭게 배우면서 배구에서 깊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배구선수였던 어머니의 피를 고스란이 물려받았을까. 타고난 소질도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가 날리는 스파이크는 이제 거의 ‘흉기’라고 배구인들은 혀를 내두른다.

이재구 한양대 코치는 “배구선수가 갖춰야할 손목과 어깨가 좋은데다 유연성까지 겸비한 최고이 선수”라고 말했다. 이런 이경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지난해 어렵사리 실시된 드래프트 제도 폐지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경수는 자신을 둘러싼 대학·실업간의 신경전을 의식한 듯 “신생팀이 창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