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담벽을 헐고 …"

소극장 산울림에서 막올린 '불꽃의 여자 나혜석'(유진월 작 채윤일
연출)은 나혜석의 글이 암전된 객석 위로 장엄하게 낭송되면서
시작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이
여성. 연극은 그가 동경 유학중이던 1910년대 말기부터 1948년
행려병자로 죽을 때까지를 소극장 무대에 펼친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인텔리 여성이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던 염문의
주인공으로 그의 얼굴은 다양한데, 연극은 '낡은 질서에 분연히 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에 불을 비춘다.

"여자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남자들은 왜 여자한테만 정조를
요구하고 자신들은 정조를 지키지 않는가" 지금 들으면 지당하기 짝없는
말인데, 검정치마 흰저고리에 고무신 신은 백년전 공간에서 울리는
목소리들은 세상과의 정면대결이다. 아기를 낳고도 "아이 생긴 기쁨보다
일 못하는 안타까움이 더 컸다고 서슴없이 내뱉고, '자식은 어미 살점
떼어가는 악마'라고 써댄 여성. 파리 여행 중 최린과 사랑에 빠지고,
이혼당한 뒤에는 최린에게 '당신때문에 희생됐으니 위자료를 내라"고
청구한 여자. 이미 우리가 얼마쯤은 귀에 익은 이야기들이지만, 극적
에피소드의 연결은 오늘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여성들의 질곡과 사회적
억압에 관해 끊임없이 각성시켜 준다.

하지만 인물을 다룬 연극의 진정한 재미에 다가가기엔 아쉬움도 있다.
평범하지 않은 자취를 남긴 나혜석 삶의 원동력을 페미니즘적 확신에서만
찾는 듯한 유진월의 극본은 진부한 느낌. 당대의 제도와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여성 예술가의 열정과 고뇌가 좀더 무대를 채워야 하지 않았을까.
나혜석 삶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인 최린과의 사랑 대목 묘사를 거의
생략하듯 처리한 연출도 한 여성의 사회적 얼굴 뒤에 가려진 인간의
얼굴을 보고싶은 관객들 기대를 못 채웠다. 페미니스트 전사의 얼굴 뒤에
숨은 인간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는 게 연극적 상상력인데.(02)334-5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