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로부터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이동진기자입니다. 오늘은 루이스 부누엘의 걸작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가지고 욕망에 대한 글을 보냅니다. 원래 '이동진
기자의 시네마레터'는 고정적으로 금요일에 보내드렸지요. 그런데
지난 금요일엔 추석연휴였던 관계로 보내드리지 못해 오늘 보냅니다.
어제 신문에 실렸던 내용이지만 분량으로 따지면 실린 분량의 4배가
넘으니 전혀 다른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베니스 영화제 취재와 기타 조선일보 이메일클럽 운영진 내부사정으로
몇번 빠진 적이 있었던 점을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주어진
여건내에서 그런 일이 가급적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가 생기는데, 애정어린 마음을
가져주시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참, 나중에 가입하셔서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메일클럽 시네마레터는 화요일과 금요일, 이렇게
일주일에 두차례 발송됩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세요. 저희 가족은
모두들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답니다. 쩝. /이동진 기자

■모호한 욕망의 신기루

콘치타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집착하는 마티유에게 "당장 결혼을
원하시나요"라고 묻자, 마티유는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에"라고
말합니다. 콘치타를 쉽게 정복하지 못해 애태우던 마티유는 친구에게
"결혼은 나의 최후수단"이라고 속내를 드러냅니다.

거장 루이스 부누엘의 유작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콘치타와
마티유는 계속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대화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영화입니다. 믿기지
않게도 부누엘은 77세라는 나이에 이보다 더 예리할 순 없을 정도로
욕망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으며 이 영화를 욕망에 대한 탁월한
관찰기로 만들어냈지요.

이 영화는 부유한 중년의 독신남 마티유가 콘치타라는 젊은 여성과 긴
시간에 걸쳐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과정을 그리지요. 부누엘은 이
영화에서 욕망의 본질이 '충족될 수 없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마티유는 끊임없이 콘치타와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녀는 마티유가 다가가면 멀어지고 포기하면 다시 유혹하기를
반복하지요. 사실 이런 주제는 부누엘 필생의 관심사이기도 했지요.
그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나 '세브린느'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 끝내 이뤄지지 않는 욕망의 이야기를 다뤘으니까요.

결핍과 부재, 좌절과 분열은 욕망의 존재방식입니다. 욕망은 틈새와
구멍같은 것이어서, 늘 텅빈 채 껍질만 존재합니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성본능 그 자체에는 이미 완벽한 충족의 실현을 싫어하는
요소가 들어있다"고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를 소쉬르와
연계해 재해석한 자크 라캉이 욕망을 "완벽한 기의(記意)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빈 연쇄고리"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한 것도 욕망 충족의 불가능성이지요. 욕망이란 결국 특정한 목표를
향한 적극적 심리가 아니라 결핍을 피하기 위해 욕구되는 소극적
심리라고 할 수 있지요. 연인을 잃어버린 반쪽으로 표현하기를 즐기는
것도 욕망의 본성이 결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때 그 결핍은 '반쪽'이란 말에서 짐작되듯, 완전히 빈 것이 아니라
절반 쯤 비어있는 것이겠지요. 완전히 비어있는 것이라면, 즉 조금도
충족될 확률이 없다면 욕망은 다른 대상을 찾아나설 테니까요.

이 영화 제목대로 욕망의 대상이 모호한 이유는 특정한 대상을
겨냥하는 게 욕망이 아니라, 겨냥하는 속성 자체가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욕망의 대상은 편재성(遍在性)과 함께 익명성을
가진 셈입니다. 콘치타에 대한 마티유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대상들이란 단지 그때 거기에 있었을 뿐, 꼭 그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이점에서 콘치타 역에 캐롤 부케와 안젤라 몰리나, 이 두 배우를 더블
캐스팅해 2인1역으로 쓴 부누엘의 선택은 탁월했던 듯 합니다. 그것은
욕망의 이중성과 모호함을 효과적으로 은유함과 동시에 그 익명성도
강력하게 떠올리게 하지요. 콘치타를 단념할 때마다 우연히 다시
마주치게 된다는 설정은 대상의 편재를 말하고요. 이런 설정으로
대상의 분산으로 여러곳을 곁눈질하게 마련인 욕망의 속성과 한 곳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향 모두 은유할 수 있게 됩니다. 콘치타의
직업이 하녀에서 레스토랑 직원, 플라멩고 댄서로 계속 바뀌는 것도
대상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욕망의 성격을 반추하게 하는 내용이지요.

쌀쌀맞은 부케가 주로 마티유의 눈에 띄고 튕기고 떠나는 장면에
등장해 신기루같은 욕망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반면, 상냥한 몰리나는
잠시 머물러 유혹하며 충족시켜주는 듯한 장면에 나옴으로써 끝없이
달려가게 마련인 욕망의 법칙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욕망과 대상의
관계가 강력한 인력(引力)과 차갑게 내치는 척력(斥力)으로
이뤄진다는 걸 두 배우가 체현한다고나 할까요.

부케와 마주친 뒤 몰리나가 화끈 달아오르게 하면 다시 부케가
싸늘하게 거절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이런 공식은 후반에 접어들며
마티유가 콘치타와 헤어진 뒤 네번째로 세비야에서 다시 만날 때
어긋납니다. 공식대로 인물을 등장시켰던 이제까지와는 달리, 우연히
마주친 장면에서의 콘치타는 부케가 아닌 몰리나이고, 이젠 몰리나가
마티유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기까지 하니까요.

이제까지의 규칙을 스스로 어기는 이런 설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욕망이란 가끔씩 스스로의 법칙과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점입니다.
하긴, 초현실주의작품 '안달루시아의 개'로 출발했던 부누엘이 인물에
대한 수학적 법칙 그대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것도 이상스럽긴
하겠지요.

부누엘은 이 욕망의 게임에서 남성과 여성을 주체와 대상으로 명확히
자리매김해놓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영화에 대해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남성에 비해 불분명하고 행동에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하는
일부 평자의 비난은 넌센스에 가깝습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어디까지나 한 남성의 집착을 통해 욕망의 속성을 탐구하는
영화니까요. '모호한' 욕망의 대상에 또렷한 성격 묘사를 요구하는
것이나 행동의 이유를 따지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좌절은 욕망을 더욱 거센 불길로 몰아넣는 풀무질같은 겁니다. 영화
속 거듭 거절당하고도 계속 콘치타를 찾아가는 마티유의 상황은
"장애물이 있을 때 사랑이 불타오른다"는 프로이트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대상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라캉의 말도 연상되고요. 게다가 콘치타가 스트립댄스까지 서슴지
않는 천한 신분의 여성이라는 걸 감안하면 "혐오스럽고 천한 것이
우리를 유혹한다"고 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도 떠오르지요.

부누엘은 또한 욕망의 본질이 반복에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 시종 다가갔다가 달아나면 포기하고, 또다시
유혹받으면 쫓아가는 이야기를 여섯차례나 반복하는 것은 그게 욕망의
운동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둘의 섹스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콘치타는
그가 포기할라치면 머리와 다리를 살짝살짝 만지게 하거나 무릎에
앉고, 기껏 키스하는 정도에서 그치게 하지요. 그가 쳐다보는 가운데
옷을 갈아입으며 속옷을 슬쩍 보여주는 것처럼, 욕망의 대상은 늘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만 우리를 자극합니다. 마티유가 적극적으로
키스하려하자 콘치타가 이를 거부하며 머리카락에 입맞추도록 하는
장면은 이뤄지지 않으면 항상 비틀린 다른 방식으로라도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욕망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술집 손님들 앞에서 나체로 춤추는 콘치타를 발견하고 마티유가
"거짓말이 몸에 뱄군"이라며 힐난하지만 거짓말은 사실 욕망의 대상이
갖춘 본질적 성격입니다.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 대상은 욕망의
주체에게 그저 거짓말이고 허상일 따름이니까요. 콘치타가 종종
마티유를 밖에 두고 방이나 집의 문을 잠그는 데서 암시되듯, 욕망의
대상은 종종 주체에게 문을 걸어잠그기까지 합니다.

드디어 콘치타를 침대에 눕힌 마티유가 수많은 끈으로 배배 꼬인
속옷을 벗기려고 노력하다 결국 실패하며 통곡을 하는 장면은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욕망과 대상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명장면입니다.
욕망이 충족될 수 없는 이유는 라캉 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자연
상태로 회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주의자인 라캉은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인 유아기적 욕망의 충족이 불가능하기에 이후
다른 어떤 관계로도 욕망은 온전히 충족될 수 없다고 말하지요.
마티유의 집에 들어서며 콘치타가 "당신은 날 소유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의 충족 불가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언술인
셈이지요.

콘치타는 마티유가 섹스를 원할 때 거절하는 말은 늘 "내일" "모레"
혹은 "다음에"입니다. 그녀는 마티유의 행동에서 트집을 잡아 섹스를
유예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욕망 충족은 항상 지체되기 마련이지요.
왜냐하면 욕망의 시제는 미래이니까요. 과거의 욕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재의 욕망은 그저 충족되기 전의 긴장상태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욕망의 대상은 늘 주체에게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영화 속 헤어진 마티유가 콘치타가 다시 엮이도록 하는 매개체는
손수건과 훔친 돈, 종이에 남긴 주소와 양동이에 담긴 물 같은
것이지요. 눈물을 훔쳐내는 손수건이 감정을 뜻하고, 돈이 재산을,
주소가 그것을 보고 추리해 찾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꿈풀이하듯 물이 무의식을 상징한다고 보면
그야말로 욕망은 모든 것을 쏟아붓게 만든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티유는 집문서까지 콘치타에게 넘기고도 거듭 모욕을 당합니다.

물을 (정신분석학에서 흔히 그렇게 해석하듯) 무의식과 연계해서 보면
콘치타에게 물세례를 받고도 또다시 따라가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 기묘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처음엔 기차 안에서 바깥으로
지나가던 콘치타에게 보복의 의미로 물을 퍼부었던 그는, 곧 기차
안으로 따라들어온 콘치타에게서 양동이 물벼락을 맞지요. 결국 그는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무의식을 기차 바깥으로 내쏟음으로써
떨쳐버리려했지만, 부메랑처럼 돌아온 욕망의 세례를 받으며 무의식의
힘에 여전히 압도되어 있음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 속 끝없이 만리장성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욕망은 결국
신기루같은 것입니다. 욕망이 한 걸음 다가가는 순간 대상은 두 걸음
물러나는 법이니까요. 어쩌면 거대한 망상의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
끝없이 헛된 신기루를 좇는 욕망의 일대기로서 우리 삶은 탄탈로스의
고통같은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를 속인
탄탈로스는 무한지옥 타르타로스에 갇혀 발이 잠길만한 연못에서 손을
뻗치면 닿을만한 과일나무가 있는 곳에 있게 되지요. 그는 그곳에서
목이 말라 몸을 굽히면 연못이 마르고, 배고파 손을 뻗치면 과일이
달아나는 벌을 반복해 받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처럼,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일 뿐입니다. 어쩌면 좌절될 수 밖에 없는 욕망의 속성은 죽음의
쾌락으로 빠뜨리지 않고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유기체의 성스러운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충족된다면 누가 저 멀리
신기루를 향해 고통스런 발걸음을 옮기겠습니까. 그리고 걸어가
확인한 곳이 신기루가 아니라면 누가 또 다음 신기루를 향해 터벅터벅
떠나겠습니까. 욕망은 유보되지 않으면 에너지가 되거나 승화될 수
없겠지요. 대상이 신기루같은 것이기에 욕망은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고, 그렇게 욕망이 남아있는 한 삶은 어찌어찌 이어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