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당시 23세)의
분신자살은 한국 노동사에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평화시장 일
대 노동자들의 처절했던 삶의 실체를 '분신'으로 고발했던 그
청년은 마지막 '노상 인간선언'을 남기고 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경, 청계천 6가 도로에서 화염에 싸여 의롭게 갔다. 그
러나 사건 당시, 사회일각에서는 그의 죽음을 '20대의 젊은 영
웅심리', '즉흥적인 만용', '가난에 의한 비관자살'로 부정적이
고 냉소적으로 해석을 하는 측도 없지 않았다. 특히 당시 정부
의 시각이 그러했다. 청계천 근로자들의 증언만으로는 사회적
설득력을 갖기 힘든 상황이었다. 완벽한 단서나 물증이 없는데
다 시대가 또한 그랬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조선일보사 현장 취재 기자였던 내가 단
독입수한 그의 일기장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 세상에서 확인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시대적 증인'이 된 셈이었다.1970년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3시. 사건발생 다음 날, 데스크로부터 사건의
'물증확보'를 지시받은 나는 머리가 아플만큼 참으로 막막했다.
그의 영안실(당시 명동 성모병원)에서 줄담배를 피며 '콜롬보
형사'처럼 상상과 추리를 거듭했지만, '특종의 꿈'은 좀처럼 가
닥이 잡히지 않았다. 영안실은 수십명의 내외신 기자들, 청계천
근로자들, 정부 관계자, 유족의 통곡으로 북새통이었다.'여기서,
도대체 내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끝에 조위금
접수대의 '문상객 리스트'부터 우선 살펴보기로 했다. 조위금
내용은 예상과 달리, 쓰다 남은 대학노트 뒷쪽 여백에 몇줄 적
혀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노트 한권 새로 사면 될
텐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명인사의 문상여부를
확인하다가, 순간적으로 그 노트가 너무 낡았다는 사실에 섬뜩
한 느낌이 들었다. 푸른 색 비닐커버의 두툼한 대학노트. 직감
적으로 이상해서 주위의 기자들 눈치를 살피며 슬쩍 노트를 펼
쳐보니, 뭔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이게 뭐요?' '태일이 일기
장이예요' 나는 당시 악명 높던 동대문파 소매치기 보다 더 빠
른 솜씨로 일기장을 움켜 쥔 채, 그길로 줄행랑을 놓았다. 전태
일의 일기장은 그의 '주검' 곁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제품(의류)에 종사하는 5년 경력의 재단
사입니다. 저희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 의류전문
계통으로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물론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2만여명)의 90%
이상이 평균연령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2만명 중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들은 15세의
어린 사람들로,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여 주십시오, 근로기준법이 우리나라의 법임을 잘
압니다."
이상의 내용은 그가 남긴 일기장의 주요 대목으로, 그대로 고
스란히 옮긴 것이다. 불과 몇 군데의 맞춤법이 틀렸을 뿐이었다.
더구나 정규 중학교도 아닌 고등공민학교 중학부 중퇴생의 글이
라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일기장이 대서특필로 전격 공개되자,
정부와 세상은 침묵하게 되었고, 평화시장 일대에 대대적인 개
선 조치가 단행되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입사 2년의 올챙이 기자였다.
'특종의 영광'은 나의 것이었지만, 그 '역사'는 물론 조선일보
와 한국노동사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