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숙양 피살사건은 70년대 벽두에 일어났다.
개통된지 얼마 안되는 강변도로, 코로나 승용차, '권력의 노리개'였
던 미모의 26세 여인, 권총, 오빠, 수많은 권력자의 이름과 권력의 지
저분한 행태가 이 사건에 등장한다. 사건 당일, 철늦은 함박눈까지 내
렸다. 사 건 자체로도 흥미 만점이지만 당시 지도층이 얼마나 타락했는
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범죄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막 뿌리
내리던 시기였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발견된 코로나 승용차와 정인숙(원내). 정의 수첩에선 그와 접촉했던 26명의 당시 고위층 인사 명단이 나왔다.
당혹 속에 이 사건과 마주친 것은 1970년 3월17일 한밤중. '올챙이
(견습기자)'에서 '개구리(정식기자)'로 넘어가 첫 야근을 하던 날이었
다. 통행금지가 있던 당시, 경찰 기자의 밤 근무는 서울을 동서로 나눠
돌았다. 서쪽을 담당한 내가 예정된 코스를 돌아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40분쯤. 때마침 성락희 마포서 형사과장
(당시)이 황급히 응급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눈에 큰 사건이 일어났
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 피를 흘리며 응급실 침대에
누워 링거주사를 맞고 있던 청년에게 매달렸다. 횡설수설하는 그와 한
참 씨름하다 먼저와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와 함께 병실을 뛰쳐나왔다.
그 청년이 뒷날 경찰 조사에서 범인으로 밝혀진 정양의 오빠 정종욱
씨였다. 회사에 1보를 송고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20
판 사회면 톱에는 '한강 강변로에 카빈 살인'이라는 시커먼 제목이 뽑혔
다. 강도를 당했다는 정씨가 "무슨 총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카빈 같았다"고 했기때문이다. 나중에 권총으로 정정됐다.
한밤중에 전 경찰기자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죽은 정양의 사진구하
기가 내 임무였다. 서교동 정양집으로 갔다. 정양의 어머니 전덕조씨에
게 "죽은 사람이 보상금을 많이 타려면 사진이 필요하다"고 둘러댔으나
사진이 없다고 잡아뗐다. 안방 아랫목에는 아기가 자고 있었고 윗목에는
네모난 빨간 슈트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 속에 사진이 있을 것같아 한
번 열어보겠다고 사정 했으나 전씨는 완강히 거절했다. 순간 그것을 훔
쳐 달아나겠다는 생각과 죽은 사람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무수히 교차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가방 속 내용물이 이 사건을 단순 강도 살인에서 정치 사건으
로 결정적으로 증폭시키고 엄청난 의혹을 불러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
가. 그속에는 정양이 알고 지내던 사회 저명인사 26명 이름과 전화 번호
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안방에서 자고있던 아기가 두고 두고 뉴스의 추
적대상이된 당시 세살난 정승일(나중에 성일로 개명)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슈트케이스를 훔쳐 나오지 못한 것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후회하고 있다. 사진은 결국 동사무소에 가서 복사했다.
회사에서는 사고 차량 서울 자 2-262호 코로나 승용차 사진을 찍으라
고 아우성이었다. 노고산 파출소에 설치된 수사본부에 나와 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마찬가지로 들볶이고 있었다. 함박눈 내린 파출소 주변
을 왔다 갔다하다가 코로나 승용차 안에 묘령의 여인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뒷문을 열자 여인은 앞으로 고꾸라 졌다. 정인숙이었다. 초록
색 원피스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있었다. 경찰이 산사람처럼 위장해 앉은
자세로 세워뒀던 것이다. 함박눈에 번호판이 가려져 사고 차량 발견이
늦은 것이었다.
수많은 의혹과 궁금증 그리고 흥미를 불러 일으켰던 정인숙양 사건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권력자 저 권력자의 품으로 전전하다 결
국 동생의 추한 모습을 참지못한 오빠에게 피살된 정양은 역사의 그늘에
핀 한 떨기 '악의 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