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광휘 눈부셔서 삶의 남루가 더 눈물겨운 고도. 그 늙은
베이징은 누런 황사바람 속에 누워 있다. 멀리 천안문 광장에 펄
럭이는 홍기가 보인다.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가. 석양빛을
받은 천안문은 한 채의 종가처럼 쓸쓸하다. 일찍이 하나의 건물이
저같은 고뇌의 무게로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저 집은 10년
전 광장 너머로 타오르다 스러져간 그 생명의 불꽃들을 보았을 것
이다. 사나운 짐승처럼 포효했던 그날의 함성들을 들었을 것이다.
역사의 맥박이 들리는 듯한 거대한 담론의 마당 천안문 광장. 천안문 사건때
최건의 노래는 중국청년들 사이에 가장 많이 불린 노래였다.
그 점에서 저 집은 이미 집이 아니었다. 국가 명운을 지켜본
시대의 증언자였다.
"천안문사건 이후 10년인데 저 광장에는 아직도 해원의 살풀이
가 없습니다. 언제 다시 땅이 뒤집히고 피를 부를지 모릅니다. 그
해원의 살풀이 없이 베이징은 어떤 희망과도 악수할 수 없을 것입
니다.".
천안문 사건 때 동료 대학생들과 광장에 모여 이틀을 단식하며
민주화를 외쳤다는 조선족 청년 염씨는 아직도 그날의 함성이 귀
에 쟁쟁하다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목이 터져라 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무소유'.
최건의 노래였죠. 그것은 당시 우리들의 군가였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내 꿈을, 자유를 네게 주겠어'라는 그의
노랫말은 그대로 우리의 구호였습니다. 쓰러지려 할 때마다 우리
를 묶어준 보이지 않는 끈이었습니다. 그가 동포라는 사실 때문
에 우리 조선족 청년들은 더 감격했지요.".
그 당시 '일무소유'는 말하자면 중국판 '아침이슬'인 셈이었
다.
최건이란 이름의 조선족 청년은 당시 신화처럼 떠오른 베이징
민주화운동의 꽃이었다. 사회주의적 이상과 자본주의적 현실 사
이에서 무력하게 서성대던 중국 청년들에게 그는 노래로 길을 열
어주었다.
진정한 개방과 개혁은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내면적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한된 개방, 제한된 자유 아닌 완전한
자유를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국가, 규범 같은 통제에 익숙한채
살아온 개인의 잠든 자의식을 일깨웠다. 그 점에서 그는 대중적
라오스(노사)였고 따꺼(대가, 우두머리)였다. 한 장의 붉은 천으
로 눈을 가리고 '난니완(남니만)' '조롱 속의 새' '베이징 이야
기' '최후의 총탄'을 불러 삽시간에 중국적 록음악의 불을 질렀
다.
천안문 사건의 발화점이 된 '인민영웅탑'에 이르러 염씨는 자
신이 최건의 노래처럼 연약한 '붉은 깃발 아래의 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지
요. 스크럼을 짰던 제 동료들이 쓰러졌습니다. 나는 그길로 정신
없이 광장을 나와 내몽골쪽으로 한주일 동안이나 기차를 타고 갔
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며 혼자 울었습니다. 피흘리는 동료들을
두고 떠났다는 자괴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게는 그를 위하
여 죽어야할 진정한 조국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이
나의 참 조국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던 것입니다. 중국이
내 진정한, 그리고 단 하나의 조국이었다면 내가 자리를 그렇게
쉽게 떠나올 수 있었을까요? 하나의 조국을 가진 선생은… 행복
한 사람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잠재되어 있던
소수민족의 한이 분출되어 최건같은 가인이 그토록 강렬한 에스
프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두워져가는 광장의 돌위에 앉았다. 환상과 현실은
늘 맞물려 있는가. 보다 나은 날의 환상 때문에 혁명은 이어지는
것이지만 가고나면 또하나의 쓸쓸한 현실이 남을 뿐이다.
이제 이 베이징의 하늘 어디에도 최건의 노래는 들려오지 않
는다. 그는 불순한 선동가로 블랙리스트에 오른지 오래이고 그의
노래들 또한 금지곡이 되었다.
지금 그의 종적 또한 묘연하다. 아직도 베이징 어딘가에 있다
는 설과 오래전 베이징을 떠났다는 설로 분분하다. 그는 그의 노
래 '베이징 이야기'에서 종일토록 노래해도 이 도시의 슬픔을 씻
어내지 못했노라고 했다. 아무리 노래해도 이 도시의 고독을 다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고독과 고통이 깊어질수록 사랑도
깊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잠시 떠났다해도 그는 결국 이 도시로
돌아올 사람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신세대들 사이에서 어느새 최건이 전설의 인
물처럼 잊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를 혁명가나 반체제 정치인
으로 잘못알고 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가 뛰어난 서정성을
지닌 음악인이라는 사실, 중국 록음악의 개척자라는 사실, 무엇
보다 음악으로 한시대를 증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로운 세대
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서방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록
음악에만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저항 정신이 빠진 록을 진정한
록이라 할 수 있을까요?".
작별하기전 조선족 염씨는 말했다. 최건을 이 광장에 불러들
인 것은 시대의 바람이었다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최건의 노래는
언제 다시 이 광장에 불려나올지 모른다고. 그의 노래가 다시 불
려지는 날 또 하나의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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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건(추에이지엔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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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출신의 최홍재와 장순화 사이에 태어난 조선족 3
세. 중국 록음악을 개척하여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반체제 가
수로 알려져 있다. 91년 아시아인 최초로 MTV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북경녀석들'(1993)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로카르노 영화제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95년 뉴욕타임즈가 세계적 록가수로 소
개했다. 자유와 인권, 풍자의 노래 제1집 '일무소유'는 천만장이
팔렸다. 베이징을 비롯한 중국 전역과 일본과 서방에서 수차례
공연을 가졌고, 97년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