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와 주체 ##.
1962년 11월16일 최고회의는 방미-방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김종필
정보부장 환영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윤근 최고위원(5·
16때 김포 해병여단장)에 따르면 김부장은 능난한 화술로써 이런 설명
을 하더란 것이다.
군사정부를 괴롭혔던 필립 하비브(왼쪽) 참사관은 9년뒤인 1971년 10월 주한
미대사로 부임했다.
"일본에 가서 자민당 지도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자민당에는 자칭
8개 사단이란 파벌이 있었습니다. 이 파벌은 이해가 일치되면 뭉치고
이해가 상반되면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파벌을 많이 연합시킬 수
있는 파벌의 보스가 자민당의 총재가 되고 국무총리가 되는 제도로 당
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평해 일본의 자민당은 전근대적인
정당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정당은 당내 파벌이 없는, 당 총재를
중심으로 뭉쳐서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는 정당입니다.".
이 무렵 박정희 - 김종필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란 말을
만들고 이를 실천에 옮길 국가 엘리트 중심의 정치세력을 창조하려고
했다. 두 사람은 이른바 구민간정치 세력을 사당으로 규정했다. 그리하
여 한국인의 민족성에 깊이 뿌리를 박은 파당성과 분열성과 사익지향성
을 극복할 수 있는 국익지향의 공당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그런 공당
의 조직원리로서는 당이 일단 결심하면 국회의원은 이를 정치판에서 실
천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당의 사무조직과 원내(국회
의원들)조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해서 '2원 조직'으로 불리기도 했다.
뜻은 좋았지만, 공화당의 전신인 재건동지회를 비밀리에 조직하는
데 드는 자금 마련을 위해 정보부가 조작한 증권파동은 공당의 조건인
도덕성에 타격을 주었고 주체세력의 내분 격화는 군부 엘리트 또한 분
렬성과 파당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1962-
1963년 사이에 박정희가 처절하게 경험하게 되는 한국 정치의 분열상과
파당적 생리는 그로 하여금 대중정치를 경멸·기피하게 만든다. 결국
그의 행태는 정치에서 통치로, 시끄러운 민주적 절차에서 역사를 마주
한 고독한 결단으로 기울게 된다. 박정희는 당파성과 분렬성의 근본원
인을 사대주의 전통에서 찾아냈다. 그는 이 사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주체성과 자주국방을 강조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의 김일성도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의 도전에
시달리다가 이들을 종파주의로 몰아 숙청한 뒤에는 주체란 말을 앞세워
전체주의를 강화해갔다는 점이다. 박정희·김일성 두 사람은 정권의 내
부분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주(박정희)와 주체(김일성)란 같은 화두
에 도달했다. 1972년 7·4공동성명을 전후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은 이런 요지의 농담을 했다고 한다.
"자주, 주체 등 주석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 박대통령 각
하께서 하시는 말씀과 꼭 같은데 혹시 두 분끼리 비밀접촉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자주와 주체를 추구하는 두 사람의 방법은 정반대였고 이로써 오늘
날의 남북한 격차가 예정되었다. 김일성은 혁명적 열정을 동원하여 자
체 자원만으로써 체제를 건설하는 자력갱생의 방법을 채택했고 박정희
는 국민들의 물질적 욕망을 활용하는 한편 이를 해외의 자원(시장과 자
본)과 결합시키는 대외개방적 국가발전 전략을 추구했던 것이다.
1962년말 박정희는 여전히 분주했다. 1차5개년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울산공업센터 건설, 외자도입, 국민재건운동, 한일회담, 1년 앞으로 다
가온 민정이양과 집권연장을 준비하기 위한 헌법개정 및 재건동지회 조
직등등. 박정희는 공화당 사전조직에 대해선 김종필에게 맡겨두고 최고
위원들에게도 비밀에 붙였으나 헌법개정은 공개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하도록 했다. 헌법개정의 실무책임자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 대
령이었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여 전직을 위한 고
시 공부를 한 덕분에 주체세력 인사들 가운데 법률에 가장 밝은 사람이
됐다.
박정희 의장은 미국측이 헌법개정의 방향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음
을 알았다. 마침 이석제 위원장이 제안을 했다.
"미국 사람들을 안심시켜줄 겸 해서 미국 헌법학자들을 초청해 자문
역으로 씁시다.".
박정희가 승락하자 이석제는 하버드 대학의 루퍼트 에머슨 교수와
뉴욕대학의 길버트 플랜츠 교수를 초빙했다. 플랜츠 교수는 후진국 정
부의 비교연구가 전공인 학자여서인지 한국의 실정에 매우 동정적이었
다. 그는 "미 CIA가 나에게 간섭을 많이 한다"고 불평하면서도 "한국
이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일본 모델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
고 했다.
"수백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한 서구 모델보다는 일본
의 압축적인 근대화 전략이 유효할 것입니다. 다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너무 앞서나가고 있으므로 한국이 성공하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따르
기 쉬운 이론적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 자민당의 헌법조사위원장이던 나카소네(뒤에 총리 역임)의
원도 이석제를 찾아와 한국의 헌법개정 방향에 대해서 다섯 시간이나
꼬치꼬치 캐묻고 갔다. 주한미국대사관의 하비브 참사관(뒤에 주한대사)
도 자주 이석제 위원장의 사무실에 와서는 이 조항은 어떻고 저 조항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노골적인 간여를 계속했다고 한다. 화가 난 이석제
는 어느 날 정색을 하고 하비브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그 동안 질문만 해댔으니 나도 이제는 질문할 권한이 있다
고 생각하는데···."
"뭐든지 하시오.".
"미국 대사관이 그렇게 한가한 곳입니까. 참사관이 일개 육군 장교
를 감시하러 다닐 정도로?"
"한국 군사정부의 움직임이 워낙 미묘하고 중요해서 그러니 양해하
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매일 같이 내 방에 출근하다시피하여 헌법개정안을 한 조항
한 조항씩 캐내가고 있는데, 하비브 참사관, 당신은 지금 한국 땅에서
미국 헌법을 만들고 있소?".
그날 이후 하비브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