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새벽 폐렴으로 타계한
계훈제(78)씨는 평생을
들판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문익환 백기완씨 등과 함께 재야
운동권의 원로로 손꼽혀 왔다.
60년대에 한쪽 폐를 잘라내 바짝
마른 체구였지만, 시위 현장과
재야단체 모임에서 늘 앞자리를
지켰다.
세번의 투옥과 네번의 장기
도피생활을 한 그는 {주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속박}이라며
주민등록증을 평생 만들지
않았다.
계씨는 1921년 평안북도 선천
태생. 경성제대에 재학 중이던
43년 학도병 모집을 거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시절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47년
김구 선생과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3공 시절에는 사상계 편집장,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됐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계엄령
해제를 촉구했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2년
이상 도피생활을 했다. 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85년
민통련 부의장 등으로 재야
운동을 이끌었다.
폐렴이 악화돼 거동이 힘들었던
91년 이후
민족통일민중운동전국연합
상임고문을 맡아 왔다. 폐질환과
골다공증이 악화돼 작년 9월
14일 위독해지자 각계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진주(69·화가)씨와
아들 여곤(29·고신대
의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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