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 1905년 도입…1946년 조선일보 청룡기대회로 본격 발전 ##.
♧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야구 강국이 되기까지는 9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한반도에 야구가 처음 도입된 해는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
레트가 한성기독청년회(YMCA)에 야구단을 조직한 게 시초로 알려져 있
다.
초기에는 야구가 아니라 격구 등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경
성고보(현 경기고)를 비롯하여, 휘문의숙 경신학교 보성학교 중앙학교
등학교들을 중심으로 야구팀이 속속 늘어났다. 초창기엔 야구 기술이
엉성하기 그지 없었지만, 점차 서북 지방이나 일본까지 원정갈 정도로
모양새를 갖추어 나갔다.
초창기엔 가랑이를 짧게 만든 잠방이에다 짚신 차림의 선수들이 펜
스도 제대로 없는 훈련장에서 던지고 때리는 정도였다. 글러브가 없어
맨손으로 수비하는 선수가 많았다. 포수들도 미트를 비롯한 보호장구
가 변변치 못해,투수의 공을 일일이 받지 않기도 했다. 포수가 타자로
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일어선 채 공을 받은 것도 보호대가 없었기 때
문이다.
아무런 목적없이 그냥 신체를 단련하거나 즐기려고 운동을 한다는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야구는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야구 사진은 1910년 2월 16일 한성기
독청년회와 경성고보간의 대결 장면. 빨랫 방망이처럼 생긴 배트를 치
켜들고 타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경성고보의 이영복 선수, 가슴에 YMCA
라고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미트와 마스크를 갖춘 포수 허성 선수의
주변에 사람들이 신기한듯 둘러서 구경하고 있다.
1920년 전국 규모의 야구대회가 처음으로 열렸고, 1921년 용산 철도
창 부지에서 야구 경기를 취재하는 신문기자들의 모습도 기록에 나온
다. 이 무렵여자 야구대회도 열리게 된다.
그러나 야구가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에 벌써 상업적 속성을 드러내
는 일이 자주 등장한 모양이다. 1926년에 나온 한 잡지에는 "'스포츠
맨'의 돈있는 사람에게 노예화 운동경기장이 도박판이 된대서야 좀
거 북한일이다. 홈런, 볼, 볼 한개에 ?만원의 도박금이 대롱 매여달리
고 번연한 스트라이크볼을 '볼'이라고 선언하는 한 마디에 ?천원의 입
씻기는 돈이 양복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서야, 기관 속에…구역
이 치밀어 오른다"고 적고 있다.
국내에서 야구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946년 조선일보사 주최
로 청룡기 야구대회가 열리면서부터다. 1946년 9월에 개최된 제1회 청
룡기쟁탈 전국 중고 야구선수권 대회는 전국에서 24개팀, 모두 528명
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자웅을 겨루었다.
초창기 한국 야구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1949년에 열린 제4회
청룡기 고교야구 결승전. 당시 경남중(현 경남고)과 광주서중(현 광주
일고)이 결승에서 맞붙었다. 경남중은 2-3회 대회 우승에 이어 3연패
를 노리던 당대최강팀. '태양의 사나이'라는 장태영 투수의 호투로
1 대 0으로 앞선 경남은 9회말 투아웃 이후 악송구로 동점을 허용하더
니 연장 11회에서 실책으로 점수를 헌납, 2 대 1로 광주서중에게 우승
을 내주었다. 광주서중 김양중투수는 이 경기로 일약 스타의 대열에
오른다.
이후 동아일보가 황금사자기, 중앙일보가 67년에 대통령배, 한국일
보가 71년에 봉황기 대회를 각각 창설하면서 고교야구 붐은 달구어졌
다. 고교야구 결승전이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리는 날은 일찍부터 서울
시내교통이 한산해질 정도였다.
67년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경북고 신화는 임신근·남우식·
황규봉·이선희로 이어지는 화려한 투수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중앙고
의 만능투수윤몽룡은 72년 청룡기 결승에서 무적 경북고를 꺾으면서
화제가 됐으나, 봉황기 결승에선 만루 홈런을 치고도 배명고에 역전당
하는 불운의 주인공이되기도 했다. 이후 장효조·최동원·이만수·김
성한·선동열·박노준 등이 고교야구 열기를 80년대초까지 주도했으며,
이열기는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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