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을 참패로 몰아간 한 주범 중 하나로 국영 의료 서비스의 붕괴가 꼽혔다. 영국이 자랑하던 무상 의료 시스템인 NHS(국립보건서비스)가 사실상 기능 마비에 빠져 진료를 제때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국민 불만이 폭발해 14년간 집권한 보수당에 매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심각한 치과 진료 문제가 총선 내내 주요 쟁점이 됐다. 보수당·노동당이 앞다투어 치과 서비스 개선 공약을 내놨을 정도다.
▶영국의 한 한국인 유학생이 밥 먹다 깨진 치아를 치료하려고 인근 치과 다섯 군데에 전화를 걸었지만 “최소 몇 달 기다려야 한다”며 다 거절당했다. NHS 환자로 등록만 하면 거의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등록 자체가 안 된다는 점이다. 이 유학생은 결국 진료비 140파운드(약 25만원)를 내고 간단한 처치를 받아야 했다.
▶NHS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영국 복지의 상징이었다. 누구든 무료로 의료 혜택을 주고 비용은 세금으로 부담하니 가난한 서민들에겐 의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NHS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2차 대전 직후 집권한 노동당 정부의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이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탄광에서 일해 열악한 의료 상황을 뼈저리게 겪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의사들의 거센 반대를 뚫고 NHS를 탄생시켰다.
▶영국의 ‘의료 사회주의’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결함을 드러냈다. 정부가 주는 지원금으로는 비용 충당이 되지 않자 의사들이 NHS 환자를 기피하게 된 것이다. 자기 돈 내고 치료받을 여력이 없는 계층이 치과 진료를 기다리다 못해 집에서 치아를 뽑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50대 남성은 인근 100㎞ 이내의 치과 50곳에 환자 등록을 시도했다가 모두 실패하고 치아 5개를 직접 뽑았다고 한다. 펜치나 초강력 접착제 등으로 치아 치료를 했다는 등의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헝가리나 폴란드 등지로 임플란트 등 치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치과 여행’도 성행 중이다.
▶의료 수요는 급증하지만 재정이 악화되는 바람에 세금으로 감당하는 무상 의료는 갈수록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올 초 영국에서는 전공의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6일간 파업을 벌였다. 전공의 초임이 시간당 15파운드(약 2만6000원)로 식당 웨이터 시급과 별 차이가 없다. 실질 임금이 15년 전보다 26%나 줄었다고 한다. 무상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는 너무 많아 630만명이, 760만건의 무상 의료 등록 대기 중이다. 경제도, 복지도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