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은 ‘지옥’이지만, 오늘만큼은 천국의 시간으로 보내드릴 겁니다.”
지난 7일 밤 부산국제영화제 야외 상영 무대.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정한석 프로그래머의 말은 살짝 들떠 있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코로나 첫해였던 지난해 야외 행사를 대부분 취소했던 것과는 달리, 올해는 방역 당국의 자문을 거쳐서 오픈 토크 행사를 재개했다. 이날 행사도 좌석 간 거리 두기를 적용해서 전체 좌석의 50%만 채웠는데도, 관객 12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연상호 감독을 비롯해 유아인·박정민 같은 주연 배우들이 호명될 때마다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씨의 말은 절반만 들어맞는 것이다. 이날 무대에서 상영한 연상호 감독의 ‘지옥’은 전통적인 영화가 아니라 넷플릭스 드라마였으니 말이다. 넷플릭스는 다음 달 ‘지옥’을 공개하기 앞서 전체 6부작 드라마 가운데 3부를 영화제 관객들에게 미리 선보였다. 넷플릭스의 붉은 ‘N’자 로고가 영화제 대형 스크린에 선명하게 뜨는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전날 개막식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던 배우 한소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도 넷플릭스 신작 드라마 ‘마이 네임’의 주인공 자격으로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았다. ‘마이 네임’ 역시 15일 넷플릭스 공개에 앞서 전체 8부작 가운데 3부를 상영관에서 연이어 상영 중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과 ‘스위트홈’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어워즈에서도 나란히 3관왕에 올랐다. 바야흐로 넷플릭스 드라마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안방을 차지한 셈이다.
넷플릭스는 한국 드라마·영화 같은 영상 콘텐츠의 든든한 수출선(輸出線) 역할을 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을 비롯한 한국 드라마들이 넷플릭스의 도로망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 세계 시청자들을 매료시킨다. 한국 영화계에서 ‘월드 스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해외 영화제 수상작이 아니라 넷플릭스 히트작 유무(有無)에 달려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화에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것처럼 넷플릭스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 콘텐츠 수출의 효자 노릇과 동시에 극장·방송 같은 기존 공급망을 잠식하는 파괴적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충무로(영화)와 여의도(방송)로 양분됐던 영상 산업의 전통적인 이분법도 무너지고 있다.
사실 프랑스어에서도 영화는 ‘대형 스크린(grand écran)’, 방송은 ‘작은 화면(petit écran)’일 뿐 절대적인 구분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넷플릭스의 등장 이후 21세기 영상 산업은 종말이 아니라 적응과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의 또 다른 100년을 위해서도 백년대계(百年大計)가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