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처음 공개 제기하는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 왼쪽은 이 의혹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진 후에 김 의원이 페이스북에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힌 입장문이다. / 뉴스1, 그래픽=송윤혜

“언제부터 ‘유감을 표한다’가 ‘죄송하다’를 대체하는 말이 됐죠?”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밝힌 ‘유감 표명’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지난 10월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청담동 심야 술자리 의혹’을 처음 공개 제기한 김 의원은 첼리스트 A씨가 자기 발언이 거짓말이었음을 자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대신 ‘유감’을 표명하는 입장문을 냈다. 입장문에서 그는 “이른바 ‘청담동 술자리’를 봤다고 말한 당사자가 경찰에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며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 의혹을 공개적으로 처음 제기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등 관련된 분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사과한다’가 아니라, ‘유감을 표한다’고 에둘러 말했고, 자신이 의혹 당사자로 지목했던 한동훈 법무장관에 대해서는 유감 표명 대상으로 거명하지도 않았으며, 유감 표명에조차 “(의혹이 날조된 게)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유감은 사과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사과가 아니라 비겁하게 상황을 모면하려는 꼼수”라며 “실패한 사과의 공식을 모두 갖춘 최악 사례”라고 말한다. 사과의 원칙은 ①누구에게, 무엇이 미안한지 대상과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하고 ②조건 없이 ③단순한 유감 표현을 넘어서서 책임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명확히 표현해야 한다. “정치인이 자주 범하는 ‘최악의 사과’는 “만약 ~그랬다면 사과한다”는 조건부 사과다. 조건부 사과는 ‘책임을 부정하기’ 때문이다.”(김호·정재승 책 ‘쿨하게 사과하라’)

유감을 사과의 언어라고 볼 수 있을까. 유감(遺憾)을 한자로 풀이하면 남길 유(遺), 섭섭할 감(憾), 즉,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있는 느낌’(표준국어대사전)을 말한다. 가령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캄보디아 순방 당시 김건희 여사가 현지 심장병 아동 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느라 조명을 썼다는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의 주장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데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마디로 ‘내 마음이 섭섭하다, 혹은 언짢다’는 뜻에서 쓰는 말이 유감이지, 원래 뜻은 잘못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단어는 아니다”라고 했다.

지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왜 이렇게 질척거리십니까"라고 하자,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이 "굉장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YTN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권에서 ‘유감’을 사과의 대체어로 쓰기 시작했다.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하자 ‘사과했으니 받아들인다’고 답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10월 국회 국정감사 중 ‘질척거리다’ 언쟁이 벌어졌을 때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시간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질척거리십니까?”라고 말하자,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은 “굉장한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몇 차례 공방 끝에 윤 의원이 “유감을 표한다”고 했고, 전 위원장은 “유감의 뜻을 표현하셨기에 사과를 하신 걸로 알고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이 교수는 “질척거리다라는 말에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유감이라고 말했는데 사과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앞서 나간 해석”이라고 했다.

◇잘못을 흐릴 때 사용한 외교 용어

유감은 외교 관계에서 주로 쓰는 단어다. 복잡하고 민감한 국가 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감’에 완곡한 사과의 뜻을 담아 사용해 왔다. ‘유감’이란 말을 외교 무대로 끌어들인 건 일본이다. 1984년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 일왕이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이 한·일 과거사 문제가 터질 때마다 직접적 사과를 피하면서 쓴 단어가 ‘유감’이다. 외교 관계 전문가들은 “잘못한 걸 알면서도 그 잘못을 흐릴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쓴 외교 용어로 정착됐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치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유감’을 쓰는 게 관례가 됐다는 것.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2020년 청와대 국감에서 “광화문 집회에서만 확진자가 600명 이상이고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폭발했다. 이 발언으로 논란이 커지자 그는 국회에서 “발언이 과했다”고 말했지만,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이후 본지 인터뷰에서도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이미 국회에서 유감 표명을 했다”고 답했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2020년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답변하고 있다. 노 전 실장은 청와대 국감에서 8·15 집회를 주도한 보수 단체에 대해 "집회 주동자들은 다 살인자"라고 말했다. 발언이 논란이 되자 후에 "발언이 과했다"고 했지만,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국회사진기자단

◇정치인은 왜 사과를 안 할까

왜 정치인들은 깔끔하게 사과하지 못할까. 미국 언어학자가 쓴 책 ‘공개 사과의 기술’에 답이 있다. 책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사임 연설을 예로 든다. “저는 지금의 결정에 이르게 한 사건이 벌어진 과정에서 초래되었을 수 있는 모든 피해에 깊은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저의 일부 판단이 틀렸다면, 일부는 실제로 틀렸지만, 그것은 모두 당시 국익에 최선이라는 제 믿음에서 나왔음을 말씀드립니다.” 저자는 “닉슨에게 사과는 곧 굴복이었다. 정적들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는 만족감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과하지 않는 첫째 이유를 추정했다. 그는 또 “사과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존경심을 잃는, 다시 말해 체면을 잃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느끼면 가해자는 잘못을 알면서도 잘못에 직면할 수 없고, 그릇된 명예 때문만이 아니라 법적 책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사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사과하지 않는’ 김의겸 의원이 이례적으로 공개 사과한 일이 있다. 지난달 9일 주한 유럽(EU) 대사가 민주당과 회동할 때 마치 전·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비교한 것처럼 브리핑했다가 ‘왜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느냐’는 취지의 항의를 받고 나서 그랬다. 외교 문제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27시간 만에 입장문을 내고 “말씀하신 내용과 다르게 인용을 했다”며 “혼란을 안겨드린 것에 대해 EU 대사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정치권에선 “이때도 외국 대사가 아니었으면 우기면서 도리어 역공했을 것”이란 말이 나왔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기자 출신인 김 의원이 ‘사실’을 중시하지 않고, 팩트 체크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결국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