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보와 □□□ 대표, 서울 종로구 한 식당에서 전격 회동.’
정치권의 대선 시계가 빨라지면 이런 뉴스들이 등장한다. 거물급 정치인들이 만나 중요한 대화를 나눴다는 소식이다. 이른바 ‘회동 정치’ ‘식사 정치’다. 통상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는 것 정도는 공개된다. 중량급 정치인들이 만났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계산이 깔린 전략적 행보여서다.
대선 주자들이 속속 링에 오르면서 요즘 하루 걸러 한 번씩 이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기사엔 대개 ‘모처’로 표현되지만, 상호명까지 공개될 경우 관심이 뜨거워진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만난 서울 중구 한식당 ‘달개비’는 네티즌들의 클릭 쇄도에 식당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문 대통령은 한 토론회에서 “달개비란 이름이 얼마나 예쁘냐”며 “(식당 달개비가) 달개비란 이름을 써서 참 고맙다”고 언급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펼쳐질 회동 정치의 주무대는 어디가 될까.
◇'식사 정치' 윤석열, 어디서 회동했나
야권 대선 주자 중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원희룡 제주지사(2일), 권영세 국민의힘 대외협력위원장(3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6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7일), 김영환 전 의원(8일)과 연달아 회동했다. 주로 한정식집에서 만났다. 원희룡 지사와는 서울 종로구 ‘향연’에서, 권영세 위원장과는 ‘달개비’에서, 김영환 전 의원과는 종로구 ‘편안한집’에서 회동했다. 안철수 대표와는 종로구 중식당 ‘중심’에서 만났고, 통화하다 ‘급만남’이 이뤄진 이준석 대표와는 서초구 윤 전 총장 자택 인근 맥줏집에서 만났다. 대부분 따로 방이 있는 격실 구조의 식당이었다.
윤 전 총장 측 인사는 “상대방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을 회동 장소로 정하는 편”이라고 했다. 김영환 전 의원은 당초 윤 전 총장이 경기 일산 김 전 의원 자택 쪽으로 오겠다는 것을 “멀다”고 말리자, 치과의사인 김 전 의원의 병원 쪽으로 온다고 해 ‘편안한집’에서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본지 통화에서 “윤 전 총장이 적극적이고 소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안철수 대표와 만난 ‘중심’도 안 전 대표 측 의향이 반영됐다. ‘중심’은 2012년 대선 당시 안 대표의 선거 캠프가 있던 건물을 허물고 신축한 건물에 들어선 식당이다. 안 대표는 “여기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대선 캠프를 꾸렸던 곳이라, 윤 전 총장에게도 제가 초심을 갖고 고민했던 생각을 말씀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야권 잠룡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14일 달개비에서 권영세 위원장과 회동했다. 함재연 달개비 대표는 “독립적인 공간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정치인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며 “극비 회동을 원할 땐 다른 손님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하고, 코로나로 손님이 적은 요즘은 한 층을 통째로 이용할 수 있게 해드린다”고 말했다.
여권에선 반(反)이재명 전선을 펴며 역전을 노리는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와 정세균 전 총리가 활발하게 여권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 이들은 최근 각각 양승조 충남지사, 최문순 강원지사와 만났는데 회동은 시내 음식점과 도청 구내식당 등에서 이뤄졌다. 이 전 대표와 정 전 총리 두 사람도 지난 3일 여의도 중식당 싱카이에서 비공개 회동했다. 정 전 총리 캠프 김민석 정무조정위원장은 “(정 전 총리가) 워낙 맨투맨 스킨십이 일상화돼 있고, (회동에는) 세력 확장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호텔, 지금은 시내 식당이 대세
요즘 정치인들이 시내 식당을 선호하는 편이라면, 과거 정치인들은 주로 호텔에서 만났다. 정치권에 30년간 몸담았던 한 인사는 “보안이 가장 중요했고, 격식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도 회동을 위해 호텔을 찾았다. 신라·롯데·하얏트 등 서울 시내 호텔에서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광진구 워커힐호텔 빌라는 극비 회동의 성지로 여겨졌다. 호텔이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 별장 형태로 숲속에 드문드문 세워진 빌라는 보안을 유지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와 이곳에서 비밀리에 회동해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 합당 문제를 논의했다. 1990년에는 김영삼·김종필 두 민자당 최고위원이 당 내분 수습을 위해 이곳에서 극비 회동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주로 회동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준비하면서 주로 리츠칼튼·코엑스인터콘티넨탈 등 강남권 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국회 ‘귀빈식당'과 63빌딩 중식당 ‘백리향’도 정치인들의 단골 회동 장소였다. 의사당 본관 3층에 자리한 귀빈식당은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심야 단독 회동을 열고 후보 단일화 방식에 합의한 곳이다. 백리향은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자 시절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정례 조찬 회동을 했던 곳이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대표를 만나 합당을 결정한 곳이기도 하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정치인들이 요즘은 시내 조용한 식당을 주로 찾는데, 호텔 이미지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일반 음식점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조언을 구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겸손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요즘 정치인들은 1인당 2만원대에서 아무리 비싸도 5만~6만원대를 넘지 않는 식당을 찾고, 식사 비용은 더치페이를 하기도 한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합의'로 논란이 된 송영길·이준석 양당 대표의 12일 회동은 여의도 한정식집 ‘운산’에서 이뤄졌다. 1인당 4만8000원짜리 메뉴를 먹었고, 식사 비용은 송 대표가 계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