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밥 딜런'으로 불린 멜라니 사프카가 지난 23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1972년 6월 영국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 볼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멜라니의 공연에는 비치 보이스, 엘턴 존, 조 코커 등도 출연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가장 슬픈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눈물도 흘리지 않고 요란도 떨지 않겠어요. 그저 ‘고마웠다’ 말할게요… 말없이 떠나는 것(silent goodbye) 그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에요.”

‘더 새디스트 싱(The Saddest Thing)’으로 유명한 포크 가수 멜라니 사프카(Safka)가 지난 23일(현지 시각) 78세로 사망했다고 그의 세 자녀가 페이스북으로 알렸다. 그는 테네시주 내슈빌 인근에 살았고, 사망 원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1946년 미국 뉴욕 퀸스에서 우크라이나계 연주자와 이탈리아계 재즈 가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라디오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고, 1960년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히피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싱어송라이터가 됐다.

1969년 8월 15일부터 4일간 뉴욕 근처 우유 목장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32팀의 가수와 40만명 내외의 관객이 모인 미국 청년 문화의 혁명적 현장. 이때 무대에 선 여가수는 재니스 조플린(당시 26세), 존 바에즈(28)와 23세의 무명 가수 ‘멜라니(Melanie)’였다. 당시 남성 주도의 포크계에 나타난 세 여가수는 모두 스타가 됐다. 멜라니는 특히 긴 머리에 흰 드레스를 입고 소녀 같은 음성으로 ‘히피 여신’ 이미지를 각인했다. ‘여자 밥 딜런’이라는 찬사가 나왔다. 자유주의, 반전(反戰) 시위, 반(反)공화당, 불교에 흠뻑 빠진 당시 히피 정서를 노래로 전달한 그녀였다.

서구 언론이 꼽는 멜라니의 대표곡에는 ‘더 새디스트 싱’이 없다. 우중(雨中) 관객들이 촛불을 들고 응원하는 모습을 통해 우드스톡 정신을 노래한 1970년 곡 ‘레이 다운’(빌보드 차트 6위), ‘내겐 새 롤러스케이트가 있고, 네겐 새 열쇠가 있네. 맞춰보고 확인해보자’는 프로이트적 가사로 일부 방송에서 금지된 1971년 곡 ‘브랜드 뉴 키’(빌보드 차트 1위)가 그의 대표곡 선두에 선다. 1972년 빌보드 최우수 여성 보컬상도 받았다.

한국인의 귀를 잡은 건, 1970년 발표된 곡 중 주목받지 못한 ‘더 새디스트 싱’과 ‘루비 투즈데이(원곡 롤링 스톤스)’였다. 놀란스의 ‘섹시 뮤직’, 둘리스의 ‘원티드’처럼 ‘한국에서 더 히트한 팝송’ 리스트가 있다면 반드시 올라야 하는 곡이다.

1998년 8월 뉴욕에서 열린 '어 데이 인 더 가든' 페스티벌에 출연해 노래하고 있는 멜라니 사프카. /AP연합

1970~1980년대 박원웅, 이종환, 황인용 같은 DJ이자 방송인들의 영향이 컸다. 이들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이나 음악 다방에서 팝송과 함께 가사를 번역해주며 정서적 ‘진입 장벽’을 낮춰준 것이다. DJ 이종환(1937~2013)은 노래 중간에 은은한 에코 효과를 깔고 팝송 가사를 시처럼 낭송해 큰 인기를 끌었다. ‘더 새디스트 싱’도 이런 과정을 거쳐 인기가 폭발했다. 두 곡은 멜라니 음악의 본령과 달리 염세적 가사와 창법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 시대 실연(失戀)한 청춘의 애청곡이 됐다.

채식과 단식을 하고 인도와 스리랑카 ‘불교 성자’를 추앙하고, 약물 남용 우려로 금지된 페스티벌에 기성 가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하는 등 ‘히피 정신’을 지키면서도 개인 생활은 보수적이었다. 프로듀서이자 매니저인 피터 체커릭(Schekeryk·2010년 사망)과 결혼해 1973년 첫 딸을 얻은 후에는 가정에 무게추를 더 뒀다. 2006년 방한해 임진각에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간이 콘서트를 했고, 6·25 정전 55주년이었던 2008년에는 철원 비무장지대(DMZ)의 옛 철원 노동당사 앞에서 공연했다. 최근에는 32번째 앨범 ‘세컨드 핸드 스모크’를 녹음 중이었다. 음반에는 라디오헤드의 ‘크립’이 수록될 예정이었다.

2018년 인터뷰에서 ‘여자 밥 딜런’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지켜준 건, 드레스도, 춤도, 망사 스타킹도, 엉덩이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