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국내 대표적인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합병 절차를 마치고 공식 출범했다. 합병 회사의 사명은 ‘리벨리온’이다. 리벨리온을 창업한 박성현(40) 대표가 새 회사를 이끌고, 사피온의 최대 주주인 SK텔레콤은 전략적 투자자로 남는다. 합병 법인의 기업 가치는 약 1조3000억원으로 평가받아 국내 첫 AI 반도체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이 됐다.
두 회사의 합병이 업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 회사의 성공 여부에 국내 AI 반도체 팹리스(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하고 생산은 파운드리 업체에 맡기는 모델) 업계의 미래가 좌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팹리스는 AI 가속기(AI 모델의 연산을 빠르게 하는 반도체) 등을 설계하는 회사로 가장 대표적인 곳이 미국의 엔비디아다. 국내에도 리벨리온, 퓨리오사, 사피온, 파두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두 곳이 합쳤다. 박 대표는 본지 인터뷰에서 “AI가 활용되는 영역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나면서 AI 반도체의 쓰임도 다양해질 것”이라며 “이런 골든 타임에 한국에서 제대로 된 AI 반도체 설계 회사가 못 나오다면 앞으로 글로벌 AI 생태계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카이스트를 나와 MIT 컴퓨터공학 박사를 마치고, 미국의 인텔과 스페이스X, 모건스탠리에서 경력을 쌓았다. 리벨리온이 집중하는 분야는 신경망 처리 장치(NPU) 반도체. 거대한 데이터를 AI 모델에 입력하는 ‘학습’보다 적절한 해답을 내놓는 ‘추론’에 특화돼 있다. 5~6년 전부터 개발돼 왔지만, 최근 본격적인 양산 단계에 돌입하면서 AI 반도체의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 대표는 “현재 학습용 AI 반도체는 사실상 엔비디아가 독점하고 있지만, 추론용 반도체 시장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해 무한한 상상의 영역이나 다름없다”며 “합병을 두 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도 골든 타임을 놓치면 한국이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영영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번 합병은 지난 4월 유영상 SK텔레콤 사장이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고 한다. 박 대표는 “국내 AI 반도체 업계의 돌파구는 세계 시장 진출밖에 없다”며 “이를 위해 최소한의 기업 규모를 갖추기 위해 합병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그가 꼽는 합병의 장점은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고객사가 합쳐지면서 회사의 이력이 보강됐다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이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일 때 기존 어떤 고객사와 거래하는지가 중요하다. 합병 후 리벨리온은 국내 대기업인 SK텔레콤, KT뿐 아니라 미국, 일본, 이스라엘, 태국 등의 기업을 거래 기업 리스트에 올렸다.
갈 길은 아직 멀다. 지난해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매출은 각각 56억원과 27억원이었다. 박 대표는 “커지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생기는 빈틈을 우리가 선점하는 게 목표”라며 “모든 AI 개발사가 값비싼 엔비디아 제품을 쓸 수도 없고, 써야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오픈AI가 최근에 내놓은 챗GPT4-o의 파라미터(매개변수·AI가 학습·추론을 할 때 데이터를 서로 연결해 주는 것)는 5조개로 알려져 있지만, 메타가 내놓은 라마2의 매개변수는 700억개였다. 박 대표는 “우리의 주력 제품인 ‘리벨’의 경우, 매개변수 650억~700억개 규모의 모델에 최적화됐다”며 “여기에 가격 경쟁력까지 더하면 리벨리온이 차지할 수 있는 시장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해외 시장에서 리벨리온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리벨리온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미국 AI 반도체 스타트업인 그로크, 삼바노바와 투자 유치 경쟁을 벌였다. 이 가운데 리벨리온과 그로크가 투자를 유치했는데, 리벨리온은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로부터 1500만달러(약 200억원)를 투자받았다. 박 대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투자는 우리가 아시아의 대표 AI 팹리스 회사 중 하나로 인정받은 효과가 있다”며 “올해 매출은 200억원. 내년엔 1000억원이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