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리조나주의 마리코파 카운티의 투표용지를 모아 놓은 박스. 마리코파 카운티는 미국 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꼽힌다./REUTERS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부정선거를 주장했고, 지지자들도 동조했다. 부정선거론자들은 투표용지를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유권자 신원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투표용지가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 앞으로 사정이 달라질지 모른다. 투표용지를 공개해도 프라이버시 침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확인됐기 때문이다.

미국 과학자들이 한 지역의 실제 대선 투표 결과를 토대로 나중에 투표용지를 공개해도 유권자 신원을 보호하는 데 사실상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선거의 투명성을 더욱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투표자가 적으면 신원 노출 확률이 조금 증가하므로 선거구 통합이나 재구획을 논의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20년 11월 12일, 마리코파 카운티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가 대선 결과에 반발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때 마리코파 카운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REUTERS 연합뉴스

미국 예일대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진은 12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미국 마리코파 카운티의 2020년 총선 데이터를 활용해 투표용지 공개가 유권자 신원 노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마리코파 카운티는 애니조나주(州)의 최대 도시인 피닉스가 포함된 카운티다. 면적이 웬만한 주만큼 크고, 유권자도 450만명에 달한다. 특히 마리코파 카운티는 2016년엔 트럼프를 택했다가 2020년 바이든, 2024년 트럼프를 번갈아 뽑을 정도로 유권자의 표심이 갈려 미국 선거 최대 격전지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마리코파 카운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지난해 대선에선 폭력 사태를 우려한 마리코파 경찰이 투표소와 개표소에 금속 울타리를 설치하고, 무장 경비원과 드론 감시까지 배치했다.

연구진은 마리코파 카운티의 2020년 대선 투표 데이터를 이용해 유권자의 신원이 노출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미국은 우리로 치면 선거인 명부에 해당하는 유권자 명부(voter file)를 공개한다. 이 유권자 명부에는 이름과 주소(선거구), 투표 이력, 투표 방식(우편 투표, 임시투표, 사전 현장투표) 등이 모두 기재된다.

연구진은 “투표용지에 해당 투표가 어느 선거구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사했는지 기록되고, 유권자 명부에도 그 사람이 어느 선거구 소속으로 어떤 방식으로 투표했는지가 담긴다”며 “이렇게 중첩되는 정보가 있기 때문에 유권자의 신원이 노출될 확률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선거인 명부 자체가 공개되지 않고, 투표용지에도 선거구나 선거 방식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런 확률이 애초에 없다.

만약 같은 선거구에서 동일한 투표 방식을 사용한 유권자들이 특정 후보를 만장일치로 투표했다면, 유권자가 누굴 찍었는지 자명하다. 만장일치가 아니더라도 유권자 노출 확률은 생긴다. 20명의 유권자 중 19명이 트럼프를 찍었고, 1명이 바이든을 찍은 동일 그룹이 있다면, 이 중 한 명이 ‘내가 바이든을 찍었다’고 밝히는 순간 트럼프를 찍은 19명의 신원이 공개된다.

연구진은 이런 다양한 유권자 노출 상황을 확률로 계산했다. 그 결과 단순히 선거 결과만 공개됐을 경우 유권자 노출 확률은 0.00009%에 불과했다. 사실상 제로(0)다. 선거구별 집계 데이터에 투표 방식 데이터까지 함께 공개할 경우에는 노출 확률이 0.05%로 높아졌다.

마지막으로 익명 처리된 개별 투표용지까지 공개하면 신원 노출 확률이 0.17%까지 높아졌다. 투표용지까지 공개해도 여전히 99.83%의 유권자는 신원이 보호된다는 의미다.

논문에 따르면 유권자 신원 노출 확률이 높은 경우는 마리코파 카운티 743개 선거구 중 투표자가 30명 이하인 곳에 집중됐다. 연구진은 “선거구를 통합하거나 재구획하는 등의 방법으로 특정 선거구 내 만장일치가 발생하지 않게 하면 유권자 노출 확률도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이끈 시로 쿠리와키(Shiro Kuriwaki) 예일대 교수는 “선거 결과의 투명성과 유권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선거 결과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우리의 분석 결과가 중요한 틀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 자료

Science Advances(2025), DOI: https://doi.org/10.1126/sciadv.adt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