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 골목 하수구 덮개에 ‘쓰레기통 아님’ 문구를 쓰고 있는 ‘너울너울 스튜디오’ 멤버들. 박규빈씨 등은 올여름 수해 방지를 위해 하수구 청소 활동도 하고 있다. /박규빈씨

지난 10일 오후 9시쯤 서울 강남역 인근 한 편의점 앞. 시민 8명이 아스팔트 도로 위 빗물받이 덮개 주변에 모여 앉아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쓰레기 그만 버려’라고 글씨를 쓰는 사람도, 하얀 오리와 초록색 새싹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바닥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테헤란로 골목골목을 돌며 빗물받이 덮개를 열어 그 속에 쌓여 있는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1시간도 채 안 돼 50L 종량제 봉투가 가득 찼다.

공간 디자이너 박규빈(31)씨는 2년 전 강남역 물난리와 신림동 침수 등 여러 수해를 경험했다. 그는 “공간의 작은 변화가 시민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하수구를 치우고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고 했다. 실제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의 연구 결과, 담배꽁초, 비닐 등 쓰레기로 빗물받이가 막히면 역류 현상으로 도로 침수가 3배가량 빨라진다고 한다. 하수 시설이 완비돼 있어도 쓰레기가 쌓이면 수해 때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22년 8월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장애인 가족 3명이 불어난 물에 목숨을 잃었다.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박씨는 예술가 윤다영(35)씨를 비롯해 영상 디자이너, 개발자, 작가 등의 문화·예술인 4명을 모아 ‘너울너울 스튜디오’를 꾸렸다. 이른바 ‘하수구 청소’ 모임이다. 작년부터는 한 공익 재단과 ‘쓰담필터’라는 이름으로 모여 시민 70여 명과 함께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수구 덮개 옆에 ‘쓰레기 No’ ‘쓰레기 안 버리는 당신이 Good’ 같은 문구를 귀여운 그림과 함께 새긴다. 흡연자 등 시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려다가도 ‘안 되겠다’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자는 취지였다. 행동경제학에선 이를 너지 효과(nudge effect)라고 부른다. 실제 쓰레기장을 꽃밭으로 만드는 등 너지 디자인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이들이 그린 그림은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간다. 화방을 운영하는 윤씨가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낸 친환경 물감을 썼기 때문이다. 윤씨는 “일반 상용 물감은 미세 플라스틱으로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주장도 있다”며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감자 전분, 물엿 등으로 만든 친환경 물감을 개발했다”고 했다.

‘너울너울 스튜디오’ 소속 예술인들은 “앞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 전국적으로 수해를 막고 환경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하수구를 치우고 있으면 ‘이렇게 고생하는데 여기 쓰레기 버리면 안 되겠다’며 응원을 보내주는 시민들이 많다. 시민들 응원에 힘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수해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며 더 많은 곳을 누비고 다닐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