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Multiverse·다중우주)에선 모든 일이 가능해진다. 어떤 우주에선 한국형 히어로 마석도(마동석)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히어로 ‘플래시’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14일, 21일 개봉을 앞둔 영화 ‘플래시’와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모두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 영화다. 히어로물의 양대 산맥 DC코믹스와 마블의 캐릭터가 ‘멀티버스’로 맞대결을 펼치게 된 셈. 주인공이 다른 차원의 우주로 이동하다 시공간이 뒤엉키고, 결국 모든 우주가 붕괴할 위험에 처한다는 줄거리도 유사하다.
지난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쓰는 등 최근 몇 년간 할리우드에선 멀티버스를 다룬 영화가 쏟아졌다. 멀티버스 세계관은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무한히 존재할 수 있다는 다중우주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할리우드는 왜 멀티버스에 빠졌을까. 히어로 영화에서 멀티버스 설정은 팬들이 좋아하는 과거의 캐릭터나 배우를 소환하기에 적합하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선 과거 스파이더맨인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루 가필드를 불러와 대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는 흥행 수익 19억2184만달러로 역대 글로벌 흥행 순위 7위에 올랐다.
‘플래시’에서도 여러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배트맨들이 등장한다. 31년 만에 돌아온 원조 ‘배트맨’ 마이클 키튼이 은퇴 후 은둔 생활 중인 배트맨 역을 맡았고, 1990년대 슈퍼맨 역에 캐스팅이 불발됐던 니컬러스 케이지도 슈퍼맨으로 깜짝 출연한다. 또 한 명의 역대 배트맨이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소식으로 관심을 모은 영화 ‘플래시’는 12일 ‘범죄도시3′을 제치고 예매율 1위에 올랐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할리우드의 흐름에 따라 여러 인종·성별·국적의 영웅을 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굳이 기존 캐릭터의 인종을 바꾸지 않더라도, 수억개의 우주 중 하나쯤엔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니 픽쳐스의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백인 남성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 대신 흑인·히스패닉 혼혈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를 내세웠다. 임신한 스파이더 우먼, 인도계 스파이더맨, 기타리스트 스파이더맨 등 그림체와 질감마저 다르게 표현된 개성 넘치는 스파이더맨들이 쏟아진다. 수백명의 스파이더맨이 펼치는 역동적인 액션신은 새로운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의 빅뱅을 보는 듯했다. 크리스틴 벨슨 소니 픽쳐스 대표는 영화 제작 초기부터 다양성이 최우선 과제였다고 밝혔고, 감독인 밥 퍼시케티 역시 “현재의 미국과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는 새로운 버전의 스파이더맨”이라고 소개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분석도 있다. 기후변화·전쟁·전염병 등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하면서 끊임없이 무력감을 느끼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SF 작가 테드 창은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운명’을 강조했고, 운명이나 신의 뜻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돼 왔다”면서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멀티버스의 부상은 스토리텔링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멀티버스 소재가 반복되면서 기시감이 든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A 우주에서 죽었던 캐릭터가 B 우주에서 되살아나는 등 멀티버스를 만능 해결 장치처럼 쓰기도 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오래전부터 할리우드는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려 왔다. 멀티버스를 다룬 몇몇 영화가 성공하면서 유행처럼 같은 소재를 쓰고 있지만 더는 신선하지 않고 새로운 통찰이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