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2008년 준공한 서울 강남구의 삼성힐스테이트는 43평형이 35억원 이상에 거래되는 고가 아파트다. 그러나 그 역사는 한국이 가난했던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건축 전 이곳에는 1974년 준공한 ‘영동 AID차관아파트’가 있었다. 그 시절 한국에 1680가구의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할 돈을 빌려준 곳이 미국의 저개발 국가 원조를 총괄하는 ‘미국국제개발처(USAID)’였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서초구에서 내년부터 입주하는 ‘래미안 트리니원’의 역사도 비슷하다. 재건축 전 이곳에는 USAID가 차관 1000만달러를 내줘 건설된 1490가구의 ‘반포 AID차관아파트’가 있었다.

▶USAID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에 대한 개발 원조를 도맡아 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1961년 독립기관으로 출범했는데, 그 배경에는 냉전이 있었다. 한국 같은 저개발 국가들이 경제성장으로 빈곤에서 벗어나야 소련의 영향력 확산이 차단돼 미국 안보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지금은 직원 1만명을 두고 연간 약 400억달러(58조원)의 예산을 쓰는 세계 최대 개발 협력 기구가 됐다.

▶USAID는 1983년까지 한국을 지원했다. 지원 목록을 보면 주요 대도시의 상·하수도부터 발전소, 시멘트 공장, 나일론 공장까지 다양한 인프라가 망라돼 있다. 한국의 과학 입국을 이끈 KAIST도 USAID의 차관 600만달러로 설립됐다. USAID가 “저소득 가정이 감당할 수 있는 소형 아파트”를 지으라며 준 차관으로 인천·부산·대구에도 아파트가 들어섰다. 미국에선 저소득층이 주로 사는 아파트를 많이 지어 주거 환경을 개선해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AID차관아파트가 들어선 반포·해운대 등은 이후 부촌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수장 일론 머스크가 USAID를 “벌레 덩어리”라고 부르며 하루아침에 본부를 폐쇄해 논란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USAID가 “급진 좌파”로 변모했다며 동조해, 국무부 산하로 통폐합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공화당엔 그간 USAID가 진보적 의제를 추진한다는 불만이 있었는데, ‘미국 우선’의 트럼프와 ‘효율’의 머스크가 만나 폐지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해외 원조 축소가 “자해”이자 “소프트파워 경쟁 중인 중국에 주는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USAID 운영에 이견이 있다고 한들, 의회가 입법을 거쳐 만든 정부 기관을 무슨 사기업 정리 해고 하듯 폐지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