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의료 파행’의 쟁점은 결국 숫자다. 정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보건사회연구원·서울대 연구 등을 바탕으로 2035년까지 ‘의사 1만명 부족’이라며 올해부터 2000명씩 더 뽑아야 한다고 했다. 의대 6년을 감안할 때 2000명 증원을 5년 유지해야 2035년에 1만명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의사 단체들은 “의사 자체가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정부의 의료 정책이 잘못돼 필수·지역 의료 분야로 의사들이 가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국민 80%는 ‘의사 충분’이란 의사단체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울 ‘빅5′로 불리는 대형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서울삼성·서울성모)에 한 번이라도 가봤거나, 군(郡) 단위에 살고 있으면 의사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국 의대학장모임은 “350명 가능”이란 숫자를 제시했다. 2000년 의약 분업이 부른 의료 파업 당시 정부가 의료계에 ‘당근’으로 제시한 것이 ‘의대 정원 351명 감원’이었다. 지난 24년간 우리 인구가 4700만명에서 5100만명으로 늘었는데, 의대 증원은 24년 전 숫자 복구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대통령실은 “서울대 의대의 경우 의대 정원이 1980년대 260명에서 지금 135명으로 절반 감소하는 동안 기초 교수는 2.5배, 임상 교수는 3배 증가했다”고 했다. 작년 말 전국 의대 40곳이 정부에 ‘당장 증원할 수 있다’고 적어낸 규모가 최소 2000명이었다.
현재 의대 정원이 3058명이다. 올해 한꺼번에 5058명으로 늘린다면 무리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의대 관계자는 “이번 기회에 확 늘리지 않으면 다른 의대와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숫자를) 적극적으로 적어 냈다”고 했다. 지금 의대가 있는 대학들은 ‘눈치작전’이 한창이라고 한다. 의대생이나 전공의 눈치를 살피면 작년처럼 2000명을 그대로 적어내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줄여 써냈다가는 자기 학교만 바보가 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한 대학병원 병원장은 “2000명과 350명의 중간쯤 적어 내자는 분위기가 있는데 전국 40곳 의대가 ‘담합’하기는 어려운 구조”라고 했다. 수도권과 지방, 대규모와 소규모 의대 간 입장 차도 크다. 수도권 의대들은 의사 확보에 어려움이 없는 만큼 증원을 최소화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지방 의대는 “지역엔 의사 자체가 부족하다”며 “지역 인재를 중심으로 최대한 많이 뽑고 싶다”고 한다. 의대 40곳 중 17곳은 정원이 50명 미만이다. 국내 최대 병원으로 꼽히는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이 연계한 의대도 신입생 정원이 40명에 불과하다. 의대생 1명에 교수(전임 교원) 2명이 붙는 상황이다. 늘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의사 증원은 필요하다. 의대가 당장 2000명을 더 가르칠 능력이 있는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각 의대에 ‘선발 자율권’을 넓혀주는 것은 어떤가. 40명 뽑는 미니 의대 정원을 3년간 120명 늘려준다고 하고 해당 의대는 2025년에 30명, 2026년에 40명, 2027년 50명으로 순차적으로 증원하는 방식이다. 정부도 “2000명 곱하기 5년은 1만명”이라며 “5년 뒤엔 숫자를 재검토한다”고 했다. ‘매년 2000명’ 보다는 ‘5년 뒤 1만명’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각 의대에 3년 또는 5년간 늘릴 정원을 쿼터처럼 할당하고 어떻게 증원할지는 각 의대에 맡기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의사들이 숫자에 집착하는 동안 죽어나는 건 국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