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디지털 생활이 표준 문명인 시대에 살고 있다. 원래 일상의 표준이라는 건 물이나 공기와 같아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한다.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 서비스가 뛰어나다고 느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시스템이 오류로 멈춰 버렸을 때다. 행정 전산망이 멈춰 서자 난리가 났다. 하필이면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에서 디지털 정부에 대해 한창 자랑하던 시점이었다. 정부24, 행정망 등 장애가 발생하고 난리가 났지만 원인조차 파악이 안 됐다. 그사이 정부에는 재난 대응에 대한 지침조차 없어 우왕좌왕 국민들만 큰 혼란을 겪었다. 민간 서비스인 카카오가 서버 화재로 멈춰 섰을 때 엄청난 압박과 제재를 가했던 정부는 행정 전산망 올스톱에는 재난 문자 한 통도 없고 행안부에서 사과조차 없이 다른 태도를 보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사실 이런 사고는 예고된 인재였다. 지난 3월에는 법원 전산망이 마비되면서 모든 서비스가 중단되었고 6월에는 초중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나이스) 4세대 시스템이 개통하자마자 먹통이 돼 혼란이 엄청났다. 그럼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이미 밝혀진 원인은 많다. 근본적으로는 낡은 시스템도 문제고 정부 전산망 구축에 자본금 5조원 이상 대기업은 참여를 금지한 법령도 문제다. 그런데 그보다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디지털 문명을 바라보는 세계관이다. 과연 우리 국민은 디지털 정부, 디지털 세계 구축이 정말 필요하다고 공감하는 것일까? 미래 정책을 제안하고 시행하는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은 디지털 세계관을 우리 사회에 정착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보인 변화 속도를 감안하면 ‘아직 멀었다’가 우리의 현 상황이다.
정치인들이 우리 사회 디지털 전환을 외친 지는 꽤 오래되었고 보수나 진보에 편향되어 있지도 않았다. 현 정부에서도 디지털 전환을 위해 다양한 기관과 위원회를 구성하고 디지털 권리 장전을 발표하는 등 많은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회의 기준이다. 배달의민족, 카카오택시 등 디지털플랫폼은 툭하면 사회적 약탈자라는 이름으로 거론된다. 그들이 받아 가는 수수료는 해외 다른 플랫폼에 비해 저렴한데도 우리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까짓 플랫폼 아무나 만들면 되는 거지. 그것들 없애고 정부에서 만들어버려’ 이런 발언까지 난무한다. 한번 먹통이라도 되면 온갖 민원이 빗발치고 대표는 90도 사죄 인사를 백번은 해야 넘어갈까 말까 한다. 돈도 안 되고 욕만 먹으니 투자가 쉬울 리가 없다. 그럼 진짜 없어지는 게 나을까? 우리 국민 중 디지털 서비스 없어도 아무 문제 없는 사람은 몇 퍼센트일까? 특히 MZ라고 하는 40세 이하 디지털 원주민에게 디지털 플랫폼은 이미 일상의 공기와 같다. 그것 없이 사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니 투자가 마르고 기술 발전이 사라지면 피해자는 고스란히 이 소비자들이 본다. 정부가 하면 된다고? 정부24 트래픽은 플랫폼 사업자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인데 그래도 오류 원인조차 못 찾고 며칠을 보내는 게 현재 수준이다.
현 상태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인데 미래로 가면 더 암담하다. 올해 문명 파괴의 대명사로 떠오른 ‘초거대 생성형 AI’는 데이터를 학습해서 만들어지는 서비스다. 챗GPT의 최신 버전인 GPT4만 해도 1조원짜리 컴퓨터로 1년 학습이 필요했다고 할 정도로 많은 데이터 학습이 필요하다. 세계에서 초거대 생성형 AI 산업과 생태계를 가진 나라가 미국, 중국, 우리나라뿐인데, 우리가 거기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고유 플랫폼 기반의 데이터 주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데이터 주권이 AI 주권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일본이나 유럽은 데이터 주권이 없어 관련 연구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미래를 지배하는 AI 기술을 이어가려면 디지털 플랫폼을 활성화하고 국민들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필연인 시대가 된 것이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디지털 대전환을 적극 추진하면서 엄청난 데이터를 확보했다. 매일 12억명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규제 장벽을 철폐해 버렸다. 실제로 AI 분야에서 논문과 특허를 가장 많이 발표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미국이 미래 패권 경쟁에서 중국만 견제하는 것도 데이터를 보면 당연한 이치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를 살펴보자. 최근 우리 정부는 디지털 권리 장전을 발표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이 디지털을 배우고 활용하고 학습할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다.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원주민, 바로 MZ 세대다. 정부가 디지털 권리 장전을 만들면서 청년 세대와 소통하는 공청회를 열었는데 참신한 아이디어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필자는 공청회 사회를 보면서 이들이 새로운 표준을 만들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다.
디지털 세대는 훨씬 스마트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올해 1학기 수업 과정 중 챗GPT를 사용해봤느냐고 물었다. 학생 53%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이 청년들은 더욱 똑똑해진 AI 친구와 게임하듯 대화하며 숙제도 하고 어려운 문제도 풀어나가는 시대에 살 것이다. 기존 문명의 표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똑똑하고 정보도 많은 세대가 우리 사회 주력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미래에 큰 길은 못 내더라도 공사 허가는 내줘야 하는 게 우리 세대의 진정한 의무다. ‘나는 진짜 디지털 문명이 표준 문명이라 믿고 있는가. 세계 모든 서비스가 디지털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나는 관심 있게 학습하고 있는가. 그 새로운 디지털 인류의 세계관으로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모든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미래 대한민국을 빌려 쓰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오늘 한번쯤 꼭 곱씹어 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내 마음의 중심이 곧 대한민국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