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기자

최근 만난 인테리어 디자이너 사무실엔 특별한 방이 있었다. 대표실 깊숙한 곳에 고급 오디오까지 갖춰두고 차 마시며 대화할 수 있게 꾸민 공간이었다. 가장 공들인 곳이라기에 고객 상담용인 줄 알았더니 사표 내는 직원과 독대하는 방이었다. 디자이너는 ‘진실의 방’이라 불렀다.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실상은 나가려는 직원 가랑이 붙잡고 읍소하는 방이었다. “요즘은 고객보다 직원이 VIP”라는 그의 말이 농담처럼 안 들렸다.

주변에 부쩍 퇴사했거나 퇴사하겠다는 직장인이 많아졌다. 코로나 영향이 적잖다. 2년 가까이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직장인들이 회사와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리까지 두게 된 모양이다. 재택근무를 끝내고 사직서와 함께 회사로 복귀한 사람도 봤다. 관리자들도 싱숭생숭하긴 마찬가지다. 사석에서 만난 외국계 기업 부사장은 “‘재택’ 하라 했더니 ‘재테크’만 했더라”고 푸념했다. 아재 개그가 아니었다. 주식, 코인으로 돈 번 직원들이 줄사표를 쓰는 바람에 퇴사 쓰나미가 덮쳤다고 했다.

바야흐로 대사직(大辭職·Great Resignation) 시대다. 미국에서 작년 한 해 자발적 퇴사자 수가 통계 집계 이후 최고치인 4700여 만 명을 기록하면서 생겨난 말인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2월 자발적 이직자는 약 30만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2%, 1월은 약 33만명으로 16.9% 늘었다. MZ 세대가 촉발한 퇴사 현상에 코로나가 속력을 붙인 모양새다. 일시적 현상이 아닐 것이란 전망이 많다. 노동경제학자인 아린드라지트 두베 매사추세츠대 교수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이직하는 ‘대전환(Great Reshuffling)’ 혹은 ‘대규모 업그레이드(Great Upgrade)’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한국도 퇴사를 젊은 세대의 치기(稚氣)로 치부하던 단계는 지났다. ‘신의 직장’이라던 한국은행, 금융감독원까지 최근 퇴사 러시가 일어나고 있을 정도라니 이직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몇 해 전 신입 사원에게 꿈을 물었더니 사장 면전에서 “3년 뒤 퇴사해 카페 차리는 것”이라고 답해 기가 찼다던 중소기업 사장은, 이젠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직원을 조심한다고 했다. 퇴사 계획을 말한 직원이 차라리 솔직한 친구란 걸 알았단다. 대전환기에 이렇게 모두가 적응해 가고 있다.

퇴사를 둘러싼 세대 간 인식 차는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문제 같아 보인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감언이설로 구워삶아도 떠날 사람은 미련 없이 떠난다. 퇴사 이슈에서 ‘나가겠다는 사람 붙잡기’보다 ‘잘 떠나고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해진 듯하다.

퇴사에도 에티켓이 있다. 퇴사자만 지켜야 하는 일방적 예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칼을 뽑아 든 퇴사자가 지켜야 할 몫이 크지만 퇴사자를 보내는 회사의 태도도 중요하다. 디지털 세상에선 회사를 거쳐 간 사람들의 말이 쉽게 그 회사의 평판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터뷰한 30대 건축가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라면서 9년 전 다니던 설계 사무소에 제출한 사직서를 보여줬다. 파일함에 고이 모셔둔 A4 한 장짜리 사직서는 형식적인 말들의 조합이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회사에 다니면서 점점 쌓인 것은 불만보다는 만족감이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기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겠다”는 얘기였다. 최대한 예를 갖춰 쓴 ‘퇴사의 변’을 보고 대표가 말했단다. “사표가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출사표일세. 훨훨 날아가시게!” 그러면서 사직서에 ‘성공을 빕니다’라고 적어 줬다. 대표와 사원 관계를 끝내던 날, 인생 선배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멋지게 퇴장하고, 멋지게 결별하는 법. 대(大)사직 시대, 우리가 익혀야 할 ‘퇴장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