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의 발목을 잡아온 인플레이션 불길이 진화되고 있다는 신호가 잇따르고 있다. 통계청이 2일 발표한 한국의 5월 물가 상승률은 3.3%로 2021년 10월(3.2%) 이후 1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이번 달엔 2%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국)의 5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도 전월(7.0%)보다 0.9%포인트 줄어든 6.1%로 내려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작년 2월(5.9%) 이후 최저치다.
우리나라 물가 상승률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작년 2월 3.7%에서 6.3%(작년 7월)까지 올랐다가 전쟁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에너지·농산물 가격 폭등이란 직격탄을 맞았던 유로존도 같은 기간 5.9%에서 10.6%(작년 10월)까지 치솟았다가 전쟁 발발 당시 수준으로 낮아졌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9%(4월)로, 작년 2월(7.9%)보다 3%포인트 낮아졌다. 주요국들의 물가 상승률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지속되던 ‘끈적한 물가(sticky inflation)’ 현상이 완화되고 있는 것이다.
◇韓 물가 상승률, 빠른 둔화세
한국의 물가 상승률은 주요국보다 빠른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물가 상승률이 3%대 이하인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스페인(3.8%), 일본(3.5%), 벨기에(3.3%), 룩셈부르크·스위스(2.7%), 코스타리카(2.4%) 등 7곳뿐이다.
우리나라 물가 상승률이 낮아진 것은 에너지·원자재 등 수입 의존도가 큰 우리 경제에 ’에너지 가격 하락’이 호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18% 하락했다. 2020년 5월(-18.7%)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경유 가격이 1년 전보다 24% 낮아졌고, 휘발유도 16.5% 떨어졌다. 전체 물가 상승률에 대한 석유류의 기여도는 -0.99%포인트였다. 석유류가 물가 상승률을 약 1%포인트 끌어내렸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국제 에너지 가격이 오를 경우 인플레이션 불길이 언제든 다시 타오를 위험도 있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외식 물가 상승률은 4월 7.6%에서 5월 6.9%로 소폭 하락했고, 월세·전세 등 집세도 전셋값 하락세와 맞물려 지난달보다 0.1% 떨어졌다. 집세가 떨어진 것은 2019년 6월 이후 47개월 만이다.
국민 체감도가 높은 품목으로 구성된 생활물가 상승률이 3.2%로 전체 물가 상승률(3.3%)보다 낮아진 것도 청신호로 해석된다. 생활물가 상승률이 소비자물가를 밑돈 것은 2021년 1월 이후 28개월 만이다.
◇”2%대로 떨어질 것 기대”
정부는 6월 물가 상승률이 5월보다 내려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윤인대 기재부 경제정책국장은 “지금껏 물가에 부담을 주던 가공식품, 외식비 등이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농축산물이 수해 등으로 폭등하지만 않는다면 6월 물가 성장률은 2%대를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앞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중반까지 뚜렷한 둔화 흐름이 이어지면서 2%대로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후 다시 높아져 등락하다가 연말께 3% 내외 수준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 상승률이 둔화되고 있지만, 물가가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많이 오른 상태에서 오름세가 꺾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민들이 느끼는 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장재철 국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300원짜리 물건이 350원으로 올랐다가 360원으로 오름세가 줄어도 일반 소비자들은 ‘비싸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보경 통계청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은 “지난해 물가가 크게 올랐던 데 따른 기저 효과가 많이 작용하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내려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계절적 요인이나 대외 요건 등에 따라 가격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이 4.3%로 여전히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진정됐다고 낙관하기에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