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나베 대표 김선영은 “연기하는 순간에는 정말 살아 있다고 느낀다”며 “언젠가는 내가 존경하는 배우 예수정 선생님과 연극을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우리 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여자. 배우 김선영(47)은 생활감이 넘치는 인물을 연기해 왔다. 2015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선우(고경표) 엄마로 얼굴을 알렸고 ‘동백꽃 필 무렵’ ‘사랑의 불시착’을 지나 최근 ‘일타 스캔들’까지 명품 조연으로 기억된다. 2021년에는 ‘세 자매’로 청룡영화상 등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김선영이 대표를 맡고 있는 극단 나베가 연극 ‘에뛰드’(17~26일 예술공간 혜화)를 공연한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남편 이승원이 쓰고 연출한 신작. 최근 대학로 연습실에서 만난 김선영은 “연기 디렉터부터 무대·의상·음악 등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출연하지는 못한다”며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대에 마음껏 올리려면 내가 (드라마와 영화로)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대중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린 배우 김선영(왼쪽). 골목 아줌마들 중 막내인데 억센 경상도 사투리와 달리 눈물과 애교가 많았다.

–극단 이름이 독특하다.

“2014년 창단할 때 내가 지었다. ‘나누고 베푼다’는 뜻이었는데 ‘나누고 베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가 되고 말았다(웃음). 지원금은 신청해도 다 떨어진다. 그래서 내가 제작비를 100% 마련하고 매표 수입은 모두가 N분의 1로 나눠 갖는다. 연기 디렉터가 있는 게 우리 극단의 특징이다.”

–연기 디렉터는 어떤 일을 하나.

“배우들 연기를 분석하고 피드백을 준다. ‘스톱! 왜 그렇게 표현했어?’ ‘지금 왜 그 대사를 하는 건데?’ 질문하면서 더 섬세한 연기를 끌어낸다. 무명 시절부터 연기 디렉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극단을 만들어 실현한 셈이다.”

–’에뛰드’는 어떤 이야기인가.

“배우가 되고 싶어 마흔 살에 교사 그만두고 극단에 들어온 선미(김선미)와, 연극을 향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중고참 용준(김용준)이 주인공이다. 연기에 소질이 없지만 열정은 충만하다. 그들이 있어야 재능 있는 배우들이 더 빛난다. 좀 부족해도 무해한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나.

“어느 조직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10여 년 전 명절에 아버지가 축구 좋아하는 내 조카를 앉혀 놓고 ‘축구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길게 말씀하시는데 옆에서 듣다 화가 났다.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문제지, 누구한테 해를 끼치지도 않는데 아이 꿈을 왜 짓밟느냐. 말로든 시선으로든 함부로 평가하거나 욕하지 말자.”

연극 '에뛰드' 포스터. 극단 나베가 전작 '모럴 패밀리'를 공연할 때는 배우 정우성이 우연히 보고 감동해 "더 좋은 극장에서 공연하라"며 대관료를 전액 후원하기도 했다.

–제목은 무슨 뜻인가.

“러시아 말이라는데, 연극 바닥에서 ‘즉흥 연기’ 등으로 사용하지만 정확한 정의는 불분명하다. 허세 가득한 인물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주 쓰는 용어로 등장해 쓴웃음을 자아낸다.”

–남편이 작가 겸 연출가인데 장단점이라면.

“돌려 말하지 않고 냉정하게 의문을 제기하며 연극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가끔 의견 충돌로 며칠 동안 말을 안 하는 게 단점이다. 코로나 이후 3년 만의 신작이라 밝은 코미디를 주문했는데 블랙 코미디가 나왔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연기를 못하는 척해야 해 되게 웃기는데 나중에는 울게 된다.”

드라마 '일타 스캔들' 리딩 현장의 배우 김선영 /tvN

–생활감 넘치는 연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두루 잘한다(웃음).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내게서 선우 엄마 이미지만 원한다. 비슷한 배역이 계속 들어온다. 나는 그렇게 소비된다. (속상하냐고 묻자) 속상하지만 어떡하나. 그거라도 시켜주는 게 어디냐. 하하. 이런 이야기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 욕심은 다 내려놓았다. 연기를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사는 재미가 있다.”

–원하는 만큼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일이 없어서 걱정하지는 않는다. 어느 영화감독이 ‘선배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더라. 나는 사실 미래는 별로 생각 안 한다. 그냥 오늘 하루 연기하는 게 제일 재밌다. 꿈이라면 공연 한 달 하고 우리 극단 배우들에게 개런티 1000만원씩 주고 싶다. 진심으로.”

–연기로 자아 실현은 ‘뷰티 퀸’ ‘경남 창녕군 길곡면’ 같은 연극으로 하면 되는데 왜 뜸한가.

“촬영 스케줄과 겹치거나 선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김선영이 연극에 높은 출연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대학로 47세 배우’가 받는 시장가로 할 수 있다. 작품이 너무 좋다면 노 개런티로도 한다!”

지난 28일 대학로 예술청 '에뛰드' 연습실에서 만난 배우 김선영. "자기한테 맞는 배역이 있을 뿐, 연기의 달인은 없다." / 이태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