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한 대기업의 명함이 큰 인기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벤처 열풍이 불던 2000년쯤엔 '삼성' '○○은행' 등의 대리·과장 직급이 달린 명함을 내밀면 "아직도 이런 옛날 직장에 다니느냐"는 반(半) 농담조의 인사가 돌아왔다. 당시엔 '○○테크' 등 신기술을 연상시키는 벤처기업의 사장(CEO)이나 임원들의 명함을 선망했고 결혼 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대기업들은 박차고 나가 창업하려는 인재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미국발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한국의 벤처 열풍도 급속히 식었고, 꿈을 먹고 사는 신흥 기업 명함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이후에도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가 그다음 물결을 타고 끊임없이 생산되었지만, 한국에는 그 바람이 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역풍이 불었다. 우리 사회엔 도전보다는 안전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암묵지(暗默知)가 확산됐다. 우수한 학생들은 자연대·공대보다는 의대와 법대로 몰렸고, 창업보다는 안전한 대기업을 선택했다. 창업했다가 실패한 뒤 좀처럼 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후배들은 제도권의 깊은 벙커 속으로 들어갔다. 최근 서울대가 뽑은 9급 직원 공채에 재벌 대기업에 근무하는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대기업 연봉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60세 정년'에 사학연금을 받는다는 안정성이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논의는 사실 배부른 투정일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것이 대다수 우리 청년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손에 쥔 것은 없지만 수만명을 먹여 살리는 일터를 스스로 만들겠다는 열정을 키우는 젊은이들도 있어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
미국에선 우수한 젊은 인재 가운데 약 1%가 창업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월마트의 샘 월튼,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모두 20대에 창업했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삼성·현대·LG그룹을 만든 창업자도 모두 20대에 사업을 시작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이 쌀가게인 경일상회를 창업한 때가 23세, 고(故) 이병철 회장이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시작했을 때가 26세, 고(故) 구인회 회장이 협동조합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이 22세였다. 이들이 '신(神)의 직장'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안주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젊은 경제를 위해 중견기업을 다수 만들어내고, 창조 경제를 통해 벤처기업도 키우겠다고 약속했다.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엄단해 건강한 기업 생태계가 작동토록 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새로운 수요와 시장을 창조하고,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젊은 기업가들이 없으면 실체 없는 뜬구름 잡는 얘기일 뿐이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위로받는 젊음도 필요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Stay hungry, stay foolish(갈망하고 우직하라)'에 가슴 뛰는 청춘도 우리에겐 절실하다.
입력 2013.01.1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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