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문고본은 갈리마르 출판사가 펴내는 폴리오 시리즈다. 지난 1972년 탄생한 폴리오 시리즈는 700만부나 팔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비롯해 현재까지 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 4300여종을 출간하면서 수준 높은 선정기준을 적용해왔다.

최근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소설가 이승우(50)의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최미경·장-노엘 주테 옮김)이 폴리오 시리즈 목록에 올랐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는 노벨문학상 수상이 유력한 한국 작가로 황석영과 이승우를 꼽은 바 있다. 대산문학상·동서문학상·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이승우는 지난 2000년 장편 《생의 이면》으로 프랑스에서 공쿠르 문학상에 버금가는 페미나 문학상의 외국어 소설 부문 최종심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조용하고 진지한 영혼에서 분출된, 감동적이면서 묵직한 소설"(르 몽드), "풍요롭고 막강한 이미지가 사랑의 신화적 차원을 잘 살려준 대단한 소설"(르 피가로) 등 언론의 찬사도 누렸다.

프랑스 문단과 언론에서 주목받는 소설가 이승우는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그동안 벌여온 한국문학의 영토확장 노력의 혜택이라고 생각한다”며“우리 정부와 민간 차 원의 번역 지원 사업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젊은 신학도였던 이승우는 지난 1981년 등단 이후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세속적 삶을 형상화했다.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그는 "기독교적 세계관, 개인과 내면에 대한 관심, 그리고 정서에 덜 호소하는 내 문장이 그 쪽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이승우는 올해 안식년 휴가를 맞아 영국 런던대에 머물고 있다. 출국 직전 광화문에서 인터뷰에 응했던 그에게 이메일로 근황을 물었더니 "나는 여행자일 뿐만 아니라 생활인의 입장에서 이 도시와 맞서고 있다"고 답했다.

이승우 소설은 고향(전남 장흥)의 선배 작가 이청준의 문학적 계보를 잇는다는 평을 받아왔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들어 있는 액자소설 구조를 애용하고, 국가와 집단의 폭력이란 현실적 문제까지도 관념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감성보다는 지성의 언어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왜 소설을 쓰느냐고 진부한 질문을 던졌더니 "소설을 쓰지 않으면 사는 것 같지 않다. 내 존재 증명 같은 것"이라며 "언젠가 '나는 소설로 인생에 복무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좀 엄숙하다면, '소설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라고 해두자"고 말했다.

이승우의 최근작을 모은 소설집 《오래된 일기》의 표제작이 된 동명의 단편은 소설가의 존재 양식을 탐구한 고백록과 같다. 소설가인 '나'에게 소설쓰기란 일기쓰기와 같다. 무의식에 자리잡은 죄의식을 털어내기 위해 쓰는 일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소설가는 최초의 독자를 상상하면서 글을 쓰게 되고, 결국엔 그 상상의 독자가 원하는 대로 쓴다. 주인공 '나'에게 최초의 독자는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동갑내기 사촌이다. 사촌은 '나'가 습작한 원고를 몰래 읽은 뒤 좌절해 작가의 꿈을 접었다. 그는 '나'의 원고를 대신 정리해 문예지에 투고해 '나'를 작가로 만든 뒤 자포자기의 상태로 살아갔다. '나'는 매번 소설을 쓰면서 사촌이라면 어떻게 썼을까라고 의식하면서 그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나'의 문장은 사촌이 쓴 것이나 다름없다. '독자는 사실상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작가로 살면서 사촌을 의식 속에서 쫓아내려고 애써왔다. 작가는 독자로부터 자기 저작권을 지키고 인정받으려는 이기심(利己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가는 소설을 통해 현실에서 좌절한 독자를 위로하고 문학의 자유를 통해 해방시키려는 이타심(利他心)도 지니고 있다.

이승우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양면성과 삶의 이율배반을 냉철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모범생' 작가로 꼽힌다. 그는 "인간은 타인과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물"이라며 "자기 안의 검열자를 설득시키는 이기심이 이타주의(利他主義)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