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Bush) 미 대통령은 2001년 1월 20일 취임선서를 하면서 “전임자인 빌 클린턴(Clinton) 전 대통령을 닮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시 대통령이 취임 후 추진한 정책은 ABC 정책으로 요약돼 언론에 회자됐었다. ‘클린턴 대통령과 정반대(Anything but Clinton)’ 의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퇴임을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부시 대통령의 최근 정책은 ABC 정책의 폐기는 물론 자꾸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달 27일 미 메릴랜드주의 해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된 중동평화회의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7년간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라크를 중동문제의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기에 이 문제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에후드 올메르트(Olmert)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무드 압바스(Abbas) 수반의 손을 동시에 잡아 쥔 부시 대통령의 모습은 7년 전 클린턴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겨냥하며 가장 핵심적인 외교 의제를 중동 평화협상으로 삼았다. 그는 백악관에서 물러날 때까지 중동 평화협상에 매달리며 그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부시 대통령은 내년 초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순차적으로 방문하면서 임기 말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지난해 북한의 핵실험 후 180도 입장을 바꾼 대북정책은 클린턴 대통령이 추진한 ‘페리 프로세스’를 닮아 가고 있다. 부시 행정부 초기 대북 강경파였던 존 볼턴(Bolton) 전 유엔주재대사가 그를 극심하게 비판할 정도로 북한과의 협상에 적극적이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초기 북한과의 양자 협상도 거부했지만 이젠 크리스토퍼 힐(Hill)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은 신문 한구석에 실릴 정도로 일상적인 업무가 돼 버렸다. 최근엔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친애하는 위원장’이라고 부르며 정중하게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이 임기 말에 들어서면서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생활형 정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 언론은 임기 말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문제 등의 거대 담론보다는 비행기 출발시간 지연 축소, 주택 담보 금리 인하를 비롯한 생활 밀착형 의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렇듯 부시 대통령의 임기 말 정책은 모든 것이 수정되는 모양새다. 백악관 주변에서 그를 보좌했던 이들은 한 명, 두 명씩 곁을 떠나 보좌진을 충원하기 어렵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선(善)과 악(惡)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정치를 ‘좋은 나라’와 ‘나쁜 국가’로 단순화시킨 후 아집(我執)에 가까운 정책을 펼쳐 우방국의 지지를 잃었다. 지난해 중간선거 패배 전까지는 국내정치에서도 상대방을 인정하고 타협하기보다는 ‘힘의 정치’를 해 오다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국민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정책을 수행해 오다가 결국 임기 말에 정책을 전환함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정적(政敵)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될 꿈에 부풀어 있는 후보들이 한 번쯤은 참고해 볼 만한 미국 대통령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