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도 집에서 눈치 볼 적이 있을까. 그의 경우에는 음반 수집벽이 그렇다. 최근 국내 출간된 에세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문학동네)에서 작가는 솔직히 고백한다. “우리 집에는 1만5000장 정도의 레코드가 있는데, 이것들이 잡아먹는 공간 때문에 아내의 원성을 수시로 듣는다”고. 클래식 팬들이라면 슬며시 공감의 웃음을 짓게 되는 구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수영·맥주·야구·재즈까지 ‘오타쿠’(특정 분야에 심취한 마니아) 기질이 강한 작가다. “60년 가까이 부지런히 음반점을 들락거리고 있다”고 고백하는 음악광(狂)이기도 하다. 체코 작곡가 야나체크의 음악이 첫 장면부터 나오는 소설 ‘1Q84′, 비틀스의 노래에서 제목을 착안한 ‘노르웨이의 숲’과 ‘드라이브 마이 카’ 등이 모두 이런 애정의 결과물이다. 이번 에세이에도 작가의 독특한 취향과 수집벽은 그대로 드러난다.
우선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도 의외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를 꼼꼼하게 따지는 알뜰 소비자다. “세일하길래 사왔는데(100엔이었다) 내용물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처럼 솔직한 구매 후기로 가득하다. 실은 그만큼 많이 구입한다는 뜻이다. 작가 역시 수집광들의 고질병을 털어놓는다. “샀다가 팔고를 되풀이하는데도 어찌 된 셈인지 전체적인 수는 시시각각, 착실하게 늘고 있다.”
디지털 CD(콤팩트디스크)보다는 아날로그 LP 레코드를 선호하는 복고적 취향도 두드러진다. 이 책 역시 제목처럼 1950~1960년대 LP 황금기의 음반들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오래된 먼지투성이 레코드를 부지런히 닦거나 오디오 장비를 바꿔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LP판은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그만한 반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반면 LP 수집가들이 열광하는 명반이나 희귀반(稀貴盤)에 대한 집착이 없는 점도 특징이다. 작가 자신도 “내가 모으는 레코드의 성격은 상당히 중구난방이다. 통일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음악 칼럼니스트 류태형씨는 “음반 수집은 목적성이 강하고 강박적이기도 쉬운데, 작가의 취향은 일부러 샛길에 빠지는 것처럼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편”이라며 “음악을 듣거나 음반을 모으는 행위가 일상의 작은 일탈이자 기쁨이라는 걸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음악인 중에서도 특히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 감독을 지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小澤征爾)에 대한 편애가 두드러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미국·스위스 등에서 지휘자와 수차례 인터뷰한 뒤 대담집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를 펴내기도 했다.
오자와의 음반들이 작가를 매료한 이유는 에세이 마지막에 실린 ‘젊은 날의 오자와 세이지’에 나온다. “동양의 섬나라에서 훌쩍 건너온 가냘픈 청년이, 산전수전 겪으며 일가견이 있는 일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의 고백을 들으니, 우리가 정경화·백건우·정명훈의 음반을 사랑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