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한 번 도봉산 근처에서 생태 감수성을 기르는 강의를 듣는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식물을 심고 가꾸며 자연의 생태를 배우는 수업이다. 첫 모임 때 영상 하나를 시청했는데 그게 유독 인상 깊었다. 바로 식물 간의 소통에 관한 영상이었다. 식물끼리의 소통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 가령 해충에게 당하면 방어 물질을 생산해 잎에 쓴맛을 내고 공기를 통해 휘발성 물질을 퍼뜨려 이웃 나무에 위험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 위험신호를 감지한 나무들은 똑같이 방어 물질을 생산해내는 식으로 군락지를 보호한다. 나는 서로 돕는 이 연결망에 감명받아 돌아와서도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 연결망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식물끼리의 소통이 오히려 생존 경쟁을 불리하게 만든다고 했다. 혼자만 방어 물질을 생산해 해충으로부터 보호하면 되는데 굳이 에너지를 소모해 경쟁 식물에게 위험신호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이러한 소통은 자기방어 과정에서 이웃 나무의 우연한 도청으로 이뤄진 일일 뿐 이타적인 의도는 없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느 해석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군락지의 식물은 과연 끈끈한 연대를 맺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모여 살며 눈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생각해본 결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서 이뤄진 모든 선행이 자의에서만 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살면서 행한 선행은 몇 없지만, 마지못해 샀던 크리스마스 실의 추억이 이후 제3국의 아동 후원으로 이어진 경험은 있다. 소극적인 선의가 쌓이면 적극적인 선의는 한결 수월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 소극적인 선의는 단절되기보단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 오늘따라 이 말이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김다혜 2022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