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했다. 인도 뭄바이를 출발한 지 2주 후(about a fortnight later)였다. 이후 1953년 2월 귀국 때까지 27개월 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6·25 전쟁을 치렀다. 최전선을 쫓아다니며(chase the front lines of the war) 부상병 20만 명을 치료했다. 그가 지휘한 야전병원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훨씬 지나(well past the ceasefire agreement) 1954년 2월까지 머나먼 이국땅에서(in the faraway foreign land) 총 39개월을 머물며 한국 의료계 초석을 놓는 데도 기여했다(contribute to laying the foundation stone).
6·25 참전 인도군(軍) 중령(lieutenant colonel) 아콧 란자라지를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당시 비동맹주의를 표방하던(advocate non-alignment) 인도가 군사적 지원 대신(instead of military assistance) 파견한 의료진 책임자였다. 1917년생인 그는 1941년 군의관으로 입대해(enlist as an army surgeon)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했고, 1948~49년엔 카슈미르 산악 지대에 배치됐다. 이듬해 5000㎞ 이상 떨어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인도군의 제60 공수부대 야전병원(the 60th Parachute Field Ambulance unit)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제60 야전병원은 외과의사(surgeon) 4명, 마취의사(anesthesiologist) 2명, 일반의사(general practitioner) 8명 등 총 346명으로 구성됐으며, 란자라지 중령이 지휘한 본대는 영국군 제27여단을 지원하고, 그의 후배인 배너지 소령이 이끄는 분견대는 대구의 후방 병원을 담당했다. 그는 인도군 최초의 공수부대 군의관(first paratrooper medical officer)이기도 했다. 공수부대와 함께(together with airborne troops) 전투 현장에 낙하산을 타고 투입돼 전사자와 부상병들을 후송하고 돌봤다(evacuate and care for the dead and wounded).
란자라지 휘하 야전병원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under hazardous circumstances) 2만3000여 차례의 수술을 해가며 약 20만 명의 부상병들을 치료해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save countless lives). 한강 다리 폭파 직전 의료 장비들을 챙겨 간신히 후퇴하기도(barely retreat with medical equipment) 했고, 사흘 동안 세 차례 응급치료소를 설치했다가 폐쇄하기도(set up and close down their dressing stations) 했다.
인도군 의료진은 당시 최초의 한국 군 병원 등 4곳의 병원을 운영하며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들 교육까지 도와줘 ‘고동색 베레모의 천사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earn the moniker ‘Angels in Maroon Berets) 했다. 란자라지는 훗날 한국 정부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2020년 7월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으며, 여생을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 등에서 천연두 근절을 위해 헌신하다가(dedicate himself to smallpox eradication) 2009년 3월 29일 92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depart this life).
[영문 참고자료 사이트]
☞ https://southasianheritage.org.uk/lieutenant-colonel-rangaraj-korean-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