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물결(Nouvelle Vague)’이 멈췄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일컫는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영화감독 장 뤼크 고다르(92)가 13일 스위스 제네바 인근의 롤에서 숨을 거뒀다고 르몽드 등 외신들이 전했다. 그의 별세 소식을 접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고다르는 누벨바그 영화인 중에서도 가장 우상 파괴적이었으며 과감하게 현대 예술을 창조했다”면서 “우리는 천재적 시각을 지닌 국보(國寶)를 잃고 말았다”고 애도했다.
데뷔작으로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쓰는 경우가 있다. 누벨바그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인 고다르의 1960년 장편 데뷔 영화 ‘네 멋대로 해라’가 그랬다. 어찌 보면 경관을 죽인 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좀도둑 청년과 파리에서 유학 중인 철부지 미국 여성의 비극적 탈주기가 줄거리의 전부다. 하지만 장면의 급격한 전환을 일컫는 대담한 ‘점프 컷(jump cut)’, 카메라를 들고서 화면이 흔들리게 찍는 ‘핸드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 등 이전 영화에서 금기시하던 기법을 총동원해서 기존 영화 문법을 뒤흔들었다. 단 20여 일 만에 촬영한 이 영화로 고다르는 1960년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다. 프랑스 국민 배우로 불렸던 장 폴 벨몽도(1933~2021) 역시 반항아적 이미지의 이 영화를 통해서 세계적 스타로 부상했다. 한국에서는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맡았던 1983년 할리우드 리메이크 영화 ‘브레드레스(Breathless)’로도 친숙하다.
고다르의 초기 관심사가 영화적 혁신이었다면, 그 뒤에는 정치적 급진주의로 치달았다. 1968년 프랑스 학생 운동의 격랑 속에 칸 영화제가 개최되자 고다르는 학생들과 연대하기 위해 영화제 중단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작은 병정’(1963년) ‘중국 여인’(1967년) 같은 영화를 통해서도 알제리 독립 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당시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에 경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가 스위스 의사인 아버지와 프랑스 은행 설립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부유층 출신이라는 점. 타고난 반항아였던 고다르는 파리 소르본 대학을 중퇴한 뒤 파리 영상 자료원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1951년 전설적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창간되자 필진으로 합류해서 평론가로 먼저 필명을 날렸다.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동료 누벨바그 감독과 마찬가지로 영화광에서 평론가로, 다시 감독으로 변신한 그의 영화 경력은 박찬욱·봉준호 등 한국 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11년 미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그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