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다. 막내딸을 추방한 뒤 두 딸에게 버림받은 늙은 왕은 미쳐 날뛰고, 온갖 관계의 파탄,최악의 음행과 악행으로 얼룩진 지옥도가 무대에 펼쳐진다. 현대 한국의 ‘막장 드라마’조차 차마 상상하지 못한 불륜과 배신으로 점철된 잔혹극이다. 그런데 우리 음악극인 창극으로 셰익스피어를, 비극을, 그것도 ‘리어왕’을 할 수 있을까?
지난 29일 개막한 국립 창극단 ‘리어’(각색 배삼식, 연출·안무 정영두)는 그게 된다는 걸 보여준다. 이미 전 회차 전석 매진. 관객의 뜨거운 반응은 이 창극에 발급된 품질 보증서와 같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무대를 가능케 한 일등 공신은 무엇보다 우리 소리의 힘이다. 정한(情恨)을 표현하는 데 강한 우리 판소리 기반의 창극은 이전에도 특히 비극에 강했다. 각색을 맡은 극작가 배삼식은 “연극의 원초적 형태는 본디 음악극이었고, 결국 말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너머의 것을 드러내길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창극 ‘리어’는 그 “말 너머의 것”을 담는 창극의 실험, 오롯이 우리 소리가 질러낼 수 있는 힘의 크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원동력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 같은 소리꾼들의 압도적 합창. 연극 ‘리어왕’이라면 늙은 리어 홀로 백발을 쥐어뜯고 누더기 같은 옷을 찢으며 쏟아냈을 저주의 독백이, 창극 ‘리어’에선 왕의 마음속 소리를 하나로 모은 듯 우렁찬 판소리 코러스로 휘몰아친다. 영화 ‘기생충’으로 유명해진 정재일 음악 감독이 작곡을 맡았다. 정재일의 음악은 이전에도 배삼식의 글과 만났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도 한승석의 작창과 더불어 판소리 코러스의 위력을 입증했었다.
셰익스피어를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배삼식 작가의 극본도 창극 ‘리어’의 매력이다. 모든 순간이 시(詩)처럼 아름다운 배 작가의 글은 노자(老子)의 ‘물’의 이미지로 셰익스피어를 관통한다. 극중 유일한 충신 글로스터의 서자 에드먼드도 노자의 말로 자신의 음모를 정당화한다. “천지(天地)는 불인(不仁)이라. 참으로 옳도다! 천지는 어질지 않고 인의(仁義)는 사람의 본성이 아니니, 충(忠)도 효(孝)도 죄다 말라빠진 개뼈다귀 같은 소리다!”
관객이 무대에서 깨지고 부딪치는 무도한 인물들을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게 하는 것도 이 창극의 독특한 매력. 셰익스피어 비극을 재해석한 여느 작품들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형과 아버지 사이를 갈라 놓고 리어의 두 딸을 모두 유혹한 서자 에드먼드의 욕망, 아비를 버린 리어왕의 두 딸의 질투와 권력욕, 두 눈을 뽑힌 뒤에야 진실을 이해하는 글로스터의 어리석음을 관객은 그저 지켜본다. ‘리어’의 무대가 객석에 안기는 감정은 악인에 대한 증오보다는 아득바득 애쓰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한 연민, 처연한 서글픔에 가깝다.
이태섭 무대감독은 폭이 14m, 무대 앞쪽부터 뒤쪽까지의 깊이가 9.6m인 세트에 20톤의 물을 채웠다. 무대 위 물은 철벅철벅 소리내며 배우들을 적시고, 갖은 욕망과 비탄에 찌든 얼굴들을 비추며 관객의 마음으로 스며든다. 2만~5만원, 공연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