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클래식에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있다. 성악이나 기악에 비해서 다른 분야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인식이다. 성악에서는 조수미·홍혜경·신영옥 등 이른바 ‘3대 소프라노’ 이후 지금은 세계 오페라극장에서 한국 가수가 출연 명단에서 빠지는 날이 드물다. 2015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과 2022년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석권 이후 국제 대회에서 한국인 입상자가 없는 경우가 오히려 이례적이다.

반면 유독 약세를 면치 못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작곡이다. 작곡가 진은숙의 작품들이 해외에서 연일 연주되는 마당에 뚱딴지 같은 소리라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분야든 가장 중요한 잣대는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성’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진은숙 이후’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한국 음악계의 해묵은 숙제였다. 하지만 K클래식의 진화라고 할까. 최근 청출어람의 기세로 차세대 작곡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연주자인 조성진의 연주곡에는 흥미로운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작곡가 신동훈(42)의 실내악곡인 ‘내 그림자(My Shadow)’다. 이어서 올가을 영국 런던 심포니의 상주 연주자(Artist Portrait)에 선정된 조성진은 오는 11월에도 신동훈의 피아노 협주곡을 런던에서 세계 초연한다. 쇼팽과 라벨의 작품뿐 아니라 현대음악으로 분야를 넓히고 있는 조성진의 곁에는 언제나 작곡가 신동훈이 있는 셈이다.

조성진만이 아니다. 임윤찬은 지난 3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불과 19세의 작곡가 이하느리의 피아노 독주곡을 연주했다.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영국 런던의 위그모어홀에서도 같은 곡을 연주했다. 둘은 예원학교(중학교)에서 처음 만나서 음악적 우정을 이어온 단짝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곡가와 연주자가 지속적으로 호흡을 맞추며 단짝을 이룬다는 점이야말로 최근 K클래식의 두드러진 변화다. 영화감독의 작품에 즐겨 출연하는 배우를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국 작곡가와 연주자도 꾸준하게 협업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특히 반가운 이유가 있다. 단방향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한국 예술이 만개하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전설적 예술 기획자 댜길레프가 창단한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을 통해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 니진스키 등이 재능을 펼쳤다.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의 곡들을 피아니스트 길렐스·리히테르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초연하면서 20세기 러시아 음악을 꽃피웠다. 예술에서도 협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이 과정을 통해서 영재는 거장으로 진화한다. 21세기 한국에서 더 많은 작곡가와 연주자 ‘단짝’이 탄생하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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