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피아노 독주회에서 연주자 다음으로 관심을 모으는 건 연주 곡목. 하지만 헝가리 출신 명(名)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69)는 다음 달 내한 독주회를 앞두고 이색적인 공지 사항을 발표했다. 연주곡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대신에 ‘바흐·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의 곡 중에서’라고만 두루뭉술하게 밝힌 것.
시프는 그와 동갑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스스럼없이 ‘이상적 피아니스트’로 꼽는 명연주자다. 역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선욱의 정신적 조언자(멘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프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나는 자유와 즉흥의 힘을 믿는다. 놀라움도 공연의 한 요소이며 이러한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훨씬 큰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근 클래식에서도 ‘오마카세 스타일’의 공연이 늘고 있다. 오마카세는 일식(日食)에서 사전에 메뉴를 정하지 않고 요리사가 알아서 음식을 내주는 방식을 뜻한다. 예전에는 클래식의 경우 팝이나 가요 공연과는 달리 연주 곡목을 사전 공지하고 순서에 따라서 그대로 치는 것이 관례였다. 최근에는 이런 정형에서 탈피하는 공연이 늘었다. 시프 역시 당일 공연장의 음향이나 피아노 상태 등을 고려해서 현장에서 곡목을 확정하는 식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있다. ‘음악의 주방장’을 믿고 맡겨달라는 무언(無言)의 신호인 셈이다. 그는 “먼 미래의 저녁 식사에서 무엇을 먹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듯이, 무슨 곡을 듣게 될지 미리 알려주는 것 역시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순회 연주 때마다 전속 조율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프는 “이상적으로는 전용 피아노를 싣고 다니며 연주하고 싶지만, 비실용적이고 끔찍할 만큼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차선의 선택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전속 조율사가 현장의 피아노를 조율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4년 만의 내한인 시프의 연주회는 11월 6일 롯데콘서트홀과 10일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지난 6월 방한한 중국 여성 피아니스트 유자 왕(王羽佳·35)의 경우에도 ‘오마카세 스타일’은 흡사했다. 베토벤의 고전부터 쇤베르크·리게티·카푸스틴의 현대음악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밝혔지만, 현장에서 일부 곡목과 순서를 변경했다. 당시 공연 주최 측인 마스트미디어는 “작곡가·시대·스타일 등 정해진 틀 안에서 감상하기보다는 현장 분위기와 느낌에 따라서 관객들이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겼으면 하는 연주자 의견을 반영하여 프로그램을 일부 변경했다”고 밝혔다.
음악 칼럼니스트 이준형씨는 “리사이틀의 창안자 가운데 한 명인 리스트(1811~1886) 당시에는 연주 곡목을 사전 공지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현장에서 즉흥 연주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면서 “지금 같은 정형화된 형식은 투어 공연이 정착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완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리사이틀의 원형으로 회귀한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